신춘문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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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신춘문예는 《매일신보》에서 비롯되었으며, 《동아일보》,《조선일보》가 그 뒤를 이었다. 1937년 일본에서 발행된 󰡔신년문예작품집󰡕에 의하면, 해방 이전 일본 전역에서 46개 신문사가 ‘신년문예’를 시행했다.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등단제도라는 기존의 인식과는 달리 현재 일본에도 신춘문예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대략 10여개의 신문사인데, 《나가사키신문(長崎新聞)》, 《야마나시니치니치신문(山梨日日新聞)》, 《호쿠리쿠주니치신문(北陸中日新聞)》, 《후쿠이신문사(福井新聞社)》, 《시모스케신문(下野新聞)》, 《미나미니혼신문(南日本新聞)》, 《미야자키니치니치신문(宮崎日日新聞)》, 《이바라키신문(茨城新聞)》에서는 ‘新春文芸’(신춘문예)라는 명칭을, 《이와테일보(岩手日報)》, 《아리아케신보(有明新報)》, 《아키타사키가케신보사(秋田魁新報社)》에서는 ‘新年文芸’(신년문예)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주로 短歌、俳句、川柳、詩, 수필, 소설 등을 모집하고 있는데, 마감일은 12월 초순이며 당선작 발표는 1월 1일이다. 더구나 신춘문예 명칭과 형식을 사용한 작품 모집은 언론사 외에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주민들을 대상으로 종종 시행되고 있다.
 
* [3] 해방전의 신춘문예는 1943년 《매일신보》신춘문예로 마감되는데, 총독부에서 신춘문예 대신 "국어문예작품 총독상(문예총독상)"을 신설했기 때문이었다. 1943년 1월 28일에 문예작품에 대한 총독상의 결정이 있은 후 “文藝作品에 總督賞”(1943.2.4.), “文學의國家化-總督賞設定의要點”(1943.2.5.) 등의 다양한 기사가 게재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2월 17일에는 국어문예작품 총독상전형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리고 3월 1일 오후 1시 총독부에 모여서 추천받은 11편의 작품 중 3편을 고르고, 그 중에서 최종적으로 金村龍濟의 《아세아시집(亞細亞詩集)》을 제1회 “문예총독상”으로 선정했다. 작품의 전형을 맡은 하다(波田) 국민총력조선연맹 총장은 작품 선정사유로 “타는듯한 일본정신에의하야 일관되엿슬뿐만아니라 원숙한 문학적형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들었다. 해방이후 본격적인 신춘문예의 흐름은 1955년부터 시작된다. <ref> 조재영, 「신춘문예제도의 명칭과 기원에 관한 연구」, <한국시학연구>47집, 한국시학회, 2016.></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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