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183.96.83.199(토론)의 19124216판 편집을 되돌림
183.96.83.199(토론)의 19124121판 편집을 되돌림
31번째 줄:
고 주장한다.<ref>{{Harvnb|Bauer|2002|p=48}}.</ref>
 
또한 독일 역사학자 에버하르트 옉켈(Eberhard Jäckel)은 1986년 저서에서 홀로코스트의 한 가지 독특한 성격으로
 
:“이렇게 국가가 지도자의 권한으로 노인, 여자, 유아를 포함한 특정 인간 집단을 속전속결로 죽일 것을 공포하고, 이를 모든 국가 권력을 동원해 실행한 유례는 지금까지 없었다.”
사었다. 멩겔레 박사의 실험기록은 현재 유실되었는데 이는 그가 기록을 보냈던 [[오트마 폰 페르슈어]](Otmar von Verschuer) 박사가 기록들을 모두 파괴하였기 때문이다.<ref>{{Harvnb|Müller-Hill|1998|p=22}}.</ref>
 
는 것을 꼽았다.<ref>{{Harvnb|Maier|1988|p=53}}.</ref>
 
학살은 독일 점령지역 전역(현재는 35개의 국가)에 걸쳐서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ref>[http://history1900s.about.com/library/holocaust/blmap.htm "Holocaust Map of Concentration and Death Camps"], History1900s, About.com. 16 June 2010. Retrieved 31 July 2010.</ref> 가장 심했던 지역은 유럽 중부와 동부 지역이었다. 이 지역의 유태인 인구는 1939년에 700만 명이 넘었는데 약 500만 명이 학살당하였고, 특히 폴란드에서 300만 명, 소련에서 백만 명이 희생되었다. 또한 네덜란드, 프랑스,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등지에서도 많은 수의 유태인이 죽었다. 반제 회의(Wannsee Protocol)에서는 나치당이 그들의 “궁극적 해결책(Final Solution)"을 영국과 아일랜드, 스위스, 터키, 스웨덴, 포르투갈, 스페인 등 중립 지역에서도 실행할 계획이었다고 밝혔다.<ref>{{Harvnb|Dear|Foot|2001|p={{쪽|날짜=2014-4-30}}}}.</ref>
 
3대 혹은 4대에라도 유태인 조부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말살당하였다. 다른 학살의 경우 다른 종교로 개종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동화되면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유럽 점령지역 유태인에게 이는 적용되지 않았다.<ref name="Bauer Bstag">For a summary of this point, see: [[Yehuda Bauer|Bauer, Yehuda]] (27 January 1998). [http://www.mfa.gov.il/MFA/MFAArchive/1990_1999/1998/1/Address%20to%20the%20Bundestag-%20by%20Professor%20Yehuda%20Baue "Address to the Bundestag"]. [[Ministry of Foreign Affairs (Israel)|Israeli Ministry of Foreign Affairs]]. Retrieved 21 September 2012.</ref> 그들의 조부가 1871년 1월 18일 이전에 개종한 것이 아니라면, 모든 유태인 혈통의 사람들은 독일 통치 지역에서는 말살당할 운명이었다.<ref>{{Harvnb|Bauer|2002|p=49}}.</ref>
 
=== 집단 학살 수용소 ===
{{인용문2|유태인들은 하나의 인종인 것은 틀림없으나 인간은 아니다.|아돌프 히틀러<ref>아트 슈퍼갤만, 쥐</ref>}}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집단으로 말살시키려는 목적으로 가스실을 구비한 수용소를 지은 것은 홀로코스트의 특징이자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현상이다. 즉, 집단 인간살상이 유일한 목적인 장소는 이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이러한 수용소는 아우슈비츠(Auschwitz)를 비롯해 벨첵(Belzec), 헬름노(Chełmno), 야세노박(Jasenovac), 마자넥(Majdanek), 말리 트로스테네츠(Maly Trostenets)비보르(Sobibor), 트레블링카(Treblinka) 등에 세워졌다.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 90만명, 벨첵에서 60만명, 그리고 소비보르에서 25만명이 희생되었다.<ref>최호근, 서양현대사의 블랙박스 나치 대학살, 2006, 푸른역사</ref>
 
=== 생체 의학 실험 ===
나치 학살의 특징적 요소 중 하나는 인간을 대상으로 의학실험을 자행했다는 점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라울 힐버그(Raul Hilberg)에 따르면 "독일 의사들은 다른 전문직에 비해 대단히 나치화되었다.“<ref>{{Harvnb|Hilberg|1995|p=66}}.</ref> 실험은 아우슈비츠를 비롯해 다샤우(Dachau), 부헨발트(Buchenwald), 라벤스브뤽(Ravensbrück), 작센하우젠(Sachsenhausen), 나츠바일러(Natzweiler) 등지의 수용소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생체 실험을 거행한 의사 중 가장 악명 높은 사람은 [[아우슈비츠]]에서 근무한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 박사였다. 멩겔레 박사는 여러 가지 실험을 하였는데, 이 중에는 실험대상자를 고압력 방 안에 집어넣는 실험, 얼음방 안에 집어넣는 실험, 약 임상 실험, 아이들의 눈에 염색약을 주사하여 눈 색깔을 바꾸는 실험 등이 포함되었고, 이외에도 수많은 잔인한 [[외과]]실험이 있었다. 실험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은 거의 즉시 살해된 뒤 [[해부]]되었다. 멩겔레 박사의 실험기록은 현재 유실되었는데 이는 그가 기록을 보냈던 [[오트마 폰 페르슈어]](Otmar von Verschuer) 박사가 기록들을 모두 파괴하였기 때문이다.<ref>{{Harvnb|Müller-Hill|1998|p=22}}.</ref>
 
멩겔레 박사는 특히 집시아이들을 대상으로 많은 실험을 하였다. 그는 아이들에게 사탕과 장난감 등을 주면서 가스실로 데려갔다. 아이들은 그를 “멩겔레 삼촌(Onkel Mengele)"라고 불렀다고 한다.<ref name = "Berenbaum 2005 194_195">{{Harvnb|Berenbaum|2005|pp=194–195}}.</ref>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50쌍의 집시 쌍둥이를 돌보았던 한 유태인 수감자는 ”한 쌍의 [[쌍둥이]]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4살 정도 된 구이도(Guido)와 이나(Ina)이다. 어느 날, 멩겔레는 그들을 데리고 갔고, 그들이 돌아왔을 때는 끔찍한 상태였다. 그들은 [[샴쌍둥이]]처럼 등이 꿰매져 있는 상태였다. 상처는 감염되었고 진물이 나왔다. 그들은 하루 종일 비명을 질렀다. 그것을 본 그들의 부모 - 엄마 이름이 스텔라였다 - 는 어딘가에서 모르핀을 구해왔고 아이들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기 위해 아이들을 죽이고 말았다"고 회상했다.<ref name = "Berenbaum 2005 194_195"/>
줄 49 ⟶ 65:
독일제국 기간 민족주의와 의과학적 인종차별주의는 독일에서 매우 만연했다.<ref name = "Evans 1989 69">{{Harvnb|Evans|1989|p=69}}.</ref> 특히 교육을 받은 높은 계층의 사람들이 이 인간 불평등적인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ref>{{Harvnb|Friedlander|1994|pp=495–6}}.</ref> 비록 민족주의 정당이 1912년에 독일 제국의회(Reichstag) 선거에서 패배하였지만 반유대주의는 주요 정당들의 기반에 자리잡았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 정당 (Nazi Party; NSDAP)은 민족주의 운동에서 발전하여 1920년에 설립되었으며 반유대주의를 채택하였다.<ref>{{Harvnb|Fischer|2002|pp=47–51}}.</ref>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까지 독일복지의 발전과 함께 나타난 엄청난 과학적, 기술적 변화는 모든 사회문제의 해결이 멀지 않았다는 유토피아적 희망을 만연하게 했다.<ref>{{Harvnb|Peukert|1994|pp=280–284}}.</ref> 그와 동시에 몇몇 사람들은 다른 이들보다 생물학적으로 더 가치 있다고 여기는 세계관을 가진 인종차별주의자, 사회진화론 주장자, 우생학자들도 많이 있었다.<ref>{{Harvnb|Peukert|1994|pp=279–280}}.</ref> 역사학자 데틀레프 포이케르트(Detlev Peukert)는 반유대주의가 유대인 대학살이 일어나게 된 유일한 이유가 아니라 굉장히 많은 작은 흐름이 큰 흐름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대학살을 일으키게 된 축적된 과격화의 산물이라고 말했다.<ref>{{Harvnb|Peukert|1994|p=280}}.</ref>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전전의 낙관적인 분체의분위기는 유대인을독일 모두관료들이 몰살시킬이전에 것이다생각했던 것보다 사회적문제가 더 잘 해결될 수 없음을 알고 환멸로 변했다. "점차 생물학적으로 맞지 않는 삶을 구제하는 것보다 생물학적으로 알맞은 삶들을 구제하는 것에 더욱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ref>{{Harvnb|FlemingPeukert|19871994|p=17288}}.</ref>
 
경제 대공황의 경제적인 압박들은 독일 의학계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칠 수 없는 사람들을 안락사 시키는 것이 고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주장을 옹호하게 했다. 1933년에 나치는 힘을 얻게 되었고 그 때쯤 독일에는 이미 인종적으로 가치 있는 사람들을 구하는 반면, 인종적으로 가치 없는 이들을 사회에서 없애자는 사회정책이 존재했다.
 
히틀러는 유대인에 대한 그의 증오를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의 책 "나의 투쟁 Mein Kampf"에서 그는 유대인들을 독일의 정치적, 교육적, 문화적 사회에서 배제시키고자 하는 그의 의도를 경고했다. 그가 유대인들을 몰살시키고자 했다고 쓰지는 않았지만 사적으로는 매우 분명하게 얘기 되었다. 이미 1922년에 전해진 바에 따르면 그는 그 당시 저널리스트였던 마요르 요제프 헬(Major Joseph Hell)에게 말하기를
 
:"내가 정말 힘 있는 사람이 되면, 나는 제일 먼저 유대인을 몰살시킬 것이다. 내가 이것을 하게 될만큼 힘이 생기자마자 나는 교통 여건이 허락하는 한 뮌헨의 마리엔플레츠에 교수대를 차례로 지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유대인들은 무차별적으로 교수형을 시킬 것이고 위생에 문제가 없을 만큼 오랜 시간, 악취가 진동할 때까지 그들을 내버려둘 것이다. 그들이 교수대에서 내려오자 마자 다음 유대인이 교수형에 처해지고 뮌헨에 유대인이 없어질 때까지 교수형을 행할 것이다. 다른 도시들은 이 관행을 따라 독일 전체의 유대인을 모두 몰살시킬 것이다. "<ref>{{Harvnb|Fleming|1987|p=17}}.</ref>
 
보수적인 반유대주의에 견주어, 독일의 가톨릭에 보다 조용한 반유대주의가 존재했는데 이는 학대에 반대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없애는데 영향력을 미쳤다. 따라서 학대에 반대하는 유명한 가톨릭의 시위는 유대인 대학살을 반대하는 시위와는 동반되지 않았다.
줄 60 ⟶ 82:
정의에 의해 인종적인 적으로 여겨지는 유대인들은 절대 민족공동체에 속할 수 없었다. 그들은 철저히 사회로부터 배제되었다.<ref name = "No&Pr 1983 499"/> 독일 역사학자 데틀레프 포이케르트가 말하기를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목표는 이상적인 민족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고, 완전한 경찰의 감시 하에 모든 이단적인 행동과 그러한 모든 시도를 테러로 간주하는 것이었다.<ref>{{Harvnb|Peukert|1987|p=220}}.</ref>
 
1933년 3월 독일의회 선거에서, 나치는 반대파에 폭력을 동반한 캠페인을 더욱 심화시켰다. 지방 정부 당국의 협조에 힘입어 이들은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이들을 사법절차에 의하지 않고 구속시키기 위한 강제 수용소를 설립한다. 1933년 3월, 다하우에 가장 먼저 강제수용소가 설립되었다.<ref>{{Harvnb|Gilbert|1986|p=32}}.</ref> 이 수용소의 초기 목적은 민족 공동체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 그들을 제지가사회주의제지하는 당이 이것을 맡아야 한다고 말했다것이었다.<ref>{{Harvnb|KershawLongerich|19982012|p=570155}}.</ref> “최후의 해결책” 또는 “궁극적 해결”은 나치에게 유대인 몰살정책의 완곡한 표현이였다. 1939년 1월, 그는 공개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1930년대에 유대인의 법적, 경제적, 사회적 권리는 꾸준히 제한되었다.<ref name="Friedländer 1997 33">{{Harvnb|Friedländer|1997|p=33}}.</ref> 1933년 4월 1일 첫 국가적 유대주의 캠페인인 유대인 기업의 불매운동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1 주를 계획하였으나, 지지자가 부족하여 하루 만에 끝이 나버렸다. 1933 년, 일련의 법률이 입법되었는데, 이 법률은 핵심분야에서 유대인을 제외하는 것이었다: 전문 공무 회복에 관한 법, 제 3제국에서 통과된 첫 번째 반유대주의 법, 의사나 법률가가 되는 것, 그리고 농장을 소유하거나 농업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
 
유대인 변호사는 자격을 박탈당하였는데, 특히 드레스덴에서 유대인 변호사와 판사들은 그들의 사무실과 법정 밖으로 끌려나와 몰매를 맞았다.<ref>{{Harvnb|Friedländer|1997|p=29}}.</ref> 히틀러는 공무원들 중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이거나 그의 아버지나 아들이 참전했다면 자격을 박탈하지 않고 계속 사무실에 남아 일 할 수 있도록 했다. 히틀러는 그러나 1937년 그 면제제도를 취소했다. 유대인들은 학교와 대학 (학교의 과밀을 방지하기 위한 법)에서 제외되었고, 기자협회에서도 제외되었으며 신문사를 소유하거나 신문사의 편집장이 되는 것도 금지되었다.<ref name="Friedländer 1997 33"/>
 
1933년 7월, 유전적으로 병이 있는 자손을 낳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열등한 사람을 강제적으로 불임화 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이러한 우생정책은 200여개가 넘는 유전건강 법원이 설립되게 했고, 나치 통치 하에 400,000명이 넘는 불임시술을 받게 되었다.<ref>{{Harvnb|Proctor|1988|p=108}}.</ref>
 
1935년, 히틀러는 뉘른베르크 법을 소개했는데, 이 법은 아리안이 유대인과 성적관계를 맺거나 결혼을 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것이다. 비록 이 법이 나중에 집시와 흑인 그리고 그들의 사생아 또한 포함하게 되었지만 (독일 혈통과 독일 명예를 지키는 법)<ref>{{Harvnb|Gellately|2001|pp=216, 231}}</ref> 이 법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그들의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이와 동시에 나치는 이러한 유대인 제한법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종오염 개념을 널리 알리는 과장된 선전을 펼쳤다. 히틀러는 “혈통 법”을 문제에 대한 합법적인 규제가 미래에 일어나게 될 실패를 통해 법이 국가 사회주의 정당의 마지막 해결책이 될 것임을 말했다. 히틀러는 만약 유대인 문제가 이와 같은 법들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법에 의한 최후의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국가사회주의 당이 이것을 맡아야 한다고 말했다.<ref>{{Harvnb|Kershaw|1998|p=570}}.</ref> “최후의 해결책” 또는 “궁극적 해결”은 나치에게 유대인 몰살정책의 완곡한 표현이였다. 1939년 1월, 그는 공개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유럽 ​​내부와 외부의 국제금융 유대인이 또 다른 세계 전쟁에 빠지게 하는데 성공한다면, 그 결과는 세계의 적화가 아니라 유대인의 승리를 말하므로 유럽에서 유대인들은 몰살되어야 한다."<ref>{{Harvnb|Berenbaum|2005|p=57}}.</ref>
줄 76 ⟶ 106:
===재정착과 강제추방===
 
전쟁 이전 나치는 유럽으로부터 독일 유대인을 대량 강제추방하는 것을 고심하였다. 1938~1939년 히틀러는 샤흐트 계획에 동의했고 사흐트 계획이 필요 없어지질 때까지 수 천명의 유대인 강제추방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히틀러가 그 때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던 대학살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이전에 독일의 식민지였던 탄자니아, 사우스 웨스트 아프리카 등에서 자신들의 나라를 되찾고자 했던 계획은 히틀러에 의해 중단되었다. 그는 세상 어느 곳도 용감한 독일인의 피가 흘려지지 않은 곳이 없으며 그들의 식민지는 독일의 가장 악질적인 적을 위한 거주지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식민지 지배국가 (주로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 쫓겨난 유대인을 그들의 식민지에 살 수 있도록 하는 외교적인 노력 또한 행해졌다. 재정착이 허락된 지역으로는 영국의 팔레스타인, 이탈리아의 에디오피아, 영국의 로데시아, 프랑스의 마다가스카르, 호주가 포함되었다.
 
이 지역들 중 마다가스카르는 가장 심각하게 거론되었다. 하이드리히는 마다가스카르 계획을 “지역적인 최후의 해결책”이라 불렀다. : 마다가스카르는 외딴 곳에 위치했으며, 생존하기에 악조건을 갖추어 죽음을 재촉했다. 1938년 히틀러에 의해 승인된 재정착 계획은 아돌프 이치만의 사무실에서 시작되었으며, 1941년에 시작된 유대인 대량학살이 시작될 때 폐기되었다. 이 계획은 홀로코스트를 향한 중요한 심리적인 단계로 여겨졌다. 1942년 2월 10일 이 마다가스카스 계획이 중단되었음을 공표했다. 독일 외무부는 소비에트 연방과의 전쟁으로 인해 유대인을 동쪽으로 보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나치 관료들은 또한 유럽의 유대인을 시베리아로 이주하기 위한 계획도 세웠다. 오직 팔레스타인만이 나치의 재정착 계획에 대한 괄목할만한 결과를 냈기 때문에 독일의 시온주의 연방, 나치정부, 하바라 협정이 이 조약을 시작했다. 이 조약은 60,000 명의 독일 유대인을 이주시켰고,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까지 독일에서 팔레스타인에 1억 달러를 수송했다.
 
===강제 수용소와 노동 수용소(1933-1945)===
 
제 3제국의 시작과 함께 강제수용소가 설립되었고, 처음부터 감금을 위한 곳으로 사용되었다. 강제수용소에서 50%에 육박하는 사망률을 보이긴 했지만, 그곳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곳으로 설계 된 것이 아니었다. (1942년 나치 지배하의 폴란드에 오직 많은 학살만을 위한 6개의 대규모 집단 처형장이 세워졌다.) 1939년 이후, 많은 수용소가 유대인과 전쟁포로들이 처형당하거나, 강제 노역을 하는 장소로 변했다. 15,000개의 수용소와 보조 수용소가 독일에 세워졌으며, 대부분 동부 유럽에 위치했다. 독일 내에도 많은 유대인과 폴란드 지식인, 공산당원 혹은 로마와 신티 인구를 수용하기 위한 새로운 수용소가 많이 세워졌다.
 
수감자들을 화물차에 태워 이송하는 일은 많은 이들이 도착지에 다다르기도 전에 죽어버려 굉장히 공포스러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줄 89 ⟶ 129:
그 위원회들은 게토를 매일 운영해야 하는 책임이 있었고, 그것은 살 곳, 의료, 난방, 물, 음식의 배급문제들을 포함했다. 또한 독일인들은 위원회에 몰수시작, 강제 노동구성, 마지막으로 학살 수용소로의 추방을 용이하게 하게 하도록 하였다. 그 운영회의 기본적전략은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고, 나치정권 또는 그 대행자이 주로 협력하였다. 점점 더 끔찍한 협정 뇌물수수와 청원을 받아들였다. 전반적으로 만연한 잔인함과 죽음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위원회에 언어, 돈, 노동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의 목숨을 제공했다.
 
각각의 유대인 공동체의 궁극적인 임무는 살해되어야 할 추방자들의 이름을 수집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 주된 패턴은 이 마지막 과제를 준수하는 것이었지만, 몇몇 위원회 지도자들은 사형 이상의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어떤 한 사람도 넘겨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스트 작성을 거부한 리비우(Lviv) 그리고 요제프 파르나스(Joseph Parnas) 같은 지도자들은 총살되었다. 1942년 10월 14일에 부아로짜(Buaroza)의 전체 위원회는 추방을 협력하는 대신에 자살했다. 1942년7월 23일에 바르샤바에 아담 체르니아코프(Adam Czerniakow)는 마지막으로 게토가 청산되어 그가 다이상 무엇인가를 할 수 없을 때 자살했다. 차임 개의룸코프스키(Chaim 무덤에Rumkowski)와 있는같이 피해자의독재자에게 숫자로헌신하게 확인되었고 국립추모연구소에사람들은 의해그들의 2000년에서임무는 2003년 사이에 실시한 공식조사로있는 최종유대인들은 발견되었다.살리기 소문보다위해 다른 많은유대인들은 사람들이희생되어야 희생되었음을하는 반증한것이라고 것이다주장했다.
게토의 박해와 살인을 용이하게 하는 위원회는 독일에서도 유지되었다. 한 사무실은 유대인 위원회의 권위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지받고 강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사무실은 유대인 위원회의 지시를 복종하지 않는 유대인은 파괴자로 다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대인 전투기관이 위원회의 권위를 떨어뜨린 후 바르샤바 게토에서 발생한 것과 같은 그러한 협력관계가 무너졌을 때 독일인들은 통제를 잃게 됐다.
 
바르샤바 게토는 380,000명의 인원으로 가장 컸고 우치 게토는 160,000명의 인원으로 2번째로 컸다. 요컨대 느리고 수동적인 살인자인 미하엘 베렌바움(Michael Berenbaum)에 따르면 그곳은 거대하게 북적이는 감옥이었다. 바르샤바 게토는 폴란드 수도인구의 30%를 포함했지만 그 곳은 폴란드 수도지역의 2.4% 만을 차지했고 한 방당 평균 9.2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1940년과 1942년 사이에, 기아와 질병 특히 장티푸스 때문에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바르샤바 게토의 43,000명 이상의 거주자들은 1941년에 그곳에서 죽었고 테레지엔슈타트(Theresienstadt)에서 10분의 1이상이 죽었으며 1942년에는 그 거주자들의 반 이상이 죽었다.
 
:"독일인들은 경찰이 되었고 그들은 집들을 두드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나가, 나가, 나가, 유대인은 나가(Raus, raus, raus, Juden raus)”한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도 울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엄마가 그녀의 손에 오줌을 누어서 그 아이를 조용히 시키기 위해 음료로 주었다. 그 경찰이 갔을때 나는 그 엄마들에게 나오라고 했다. 그런데 한 아이는 두려움 때문에 죽어있었고, 다른 엄마는 그녀 자신의 아이를 기절시켜 죽였었다."
 
::- 아브라함 말릭(Abraham Malik)이 코브노(Kovno) 게토에서 경험을 저술한 것에서.
 
히틀러가 1942년 7월 19일에 추방의 시작을 지시했고 그로부터 3일 후 7월 22일에 바르샤바 게토의 추방이 시작되었다. 9월 12일까지 300,000명에 사람들이 바르샤바로부터 트레블링카(Treblinka) 학살수용소까지 화물기차로 수송되었다. 많은 다른 게토들도 완전히 인구가 줄어들었다.
 
첫 번째 빈민가 폭동은 남동 폴란드 라크바(Łachwa)의 작은 마을에서 1942년 9월 발생했다. 1943년 무장저항 시도는 바르샤바 게토봉기와 비알리스토크(Białystok) 빈민가 반란과 같이 큰 게토들에 의해 발생했지만 모든 경우 그들은 압도적인 나치 군대에 의해 실패했고 나머지 유대인들은 살해되거나 죽음의 수용소로 추방되었다.
 
===유태인 대학살(1939-1942)===
 
지역의 인구에 의한 수많은 치명적인 학살은 제 2차 세계대전 나치의 격려에 의해 일부는 자발적으로 발생했다. 이것은 1941년 6월 30일 루마니아 이아시의 학살을 포함하는데 그 학살은 14,000 유대인이 루마니아 주민과 경찰에 의해 사망하는 사건이다. 또한 1941년 7월의 실크 프로그램(Jedwabne pogrom)을 포함하는데 이는 나치 질서경찰(Nazi Ordnungspolizei)가 있는 데서 300명 유대인이 불 난 헛간에 잠기게 되는 사건이다. 독일인에 의해 같은 곳에서 40명의 유대인 남성이 처형되었다. 이것은 발굴에 참여한 고고학 및 인류학 팀에 의해 조사된 두 개의 무덤에 있는 피해자의 숫자로 확인되었고 국립추모연구소에 의해 2000년에서 2003년 사이에 실시한 공식조사로 최종 발견되었다. 소문보다 다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음을 반증한 것이다.
 
===대량 살인의 새로운 방법===
줄 103 ⟶ 162:
반제 회의는 반제의 베를린 교외에서 1942년 1월 20일에 라인 하르트 하이드리히에 의해서 소집되었고 유대인 문제 와 관련된 정책에 책임이 있는 국가 사무총장, 고위 관리, 파티의 리더, SS 장교와 정부 부처의 다른 지도자의 숫자를 포함 약 15명의 나치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정책 회의의 초기 목적은 유럽안에서의 유대인 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해결방법에 대한 계획을 논의하는 것이었다. 하이드리히는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유럽내 유대인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다양한 점령 지역에서 대량 살인을 계획했다. 특히 장관급 관료들이 이 정책을 위한 지식과 책임을 모두 공유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이히만에 의해 그려진 분의 사본은 살아있다, 하지만 하이드리히의 지시에, 그것들은 "완곡 어법 언어"로서 쓰여졌다. 따라서 회의에서 사용 된 정확한 단어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하이드리히는 동쪽에 유대인 철수 정책에 의해 추방을 나타내는 회의는 대체되었다고 연설했다. 이는 독일에 의해서 통제 되는 지역뿐만 아니라 영국과 미국을 포함하는 나머지 나라들에 의해 통제되는 지역에 사는 11만 유대인들을 포함하는 임시적인 해결방법에서 궁극적인 해결방법까지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해결방는해결방법이 상당한무엇인가에 걱정을대해서는 하고의심할 있었다고여지가 주장했다없었다. 커쇼는 "아우슈비츠로하이드리히는 가는또한 길이'최종 증오에해결책'의 의해문구에 만들어졌고의해서 무관심에이해되도록 의해분명히 길이했다.” 닦였다"고최종해결책은 비유했다‘유대인들이 강제 노동과 대량 학살의 조합에 의해 전멸할 것이다.’이다.
 
관계자는이 200만은 여전히 ​​소련의 통제하에 있었지만 230만 유대인은 일반정부, 850,000은 헝가리에, 다른 점령 국가에서 110만, USSR에서 안에 오백만까지 있었다고 들었다 - 총 약 650만. 이들은 모두 거의 모두가 한번에 가스로 죽을 폴란드에 있는 학살 수용소 (Vernichtungslager)로 기차에 의해 수송 될 것이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와 같은 일부 캠프에서는 일에 적합한 사람들은 잠시동안 살 수 있지만, 결국 모두 살해 될 것이다. 괴링의 대표, 박사 에리히 노이만은 산업 노동자들의 몇 가지 클래스에 대한 제한된 면제를 받았다.
 
===반응===
 
====독일의 대중====
 
그의 1983 책, 대중의 의견과 제 3제국의 정치적 반대에서, 이안 커쇼는 나치 기간 동안 바이에른에서 Alltagsgeschichte (일상 생활의 역사)를 조사했다. 대부분의 바이에른인의 태도를 묘사하면서, 커쇼는 가장 일반적인 관점은 유대인들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무관심이었다고 주장했다. 커쇼는 대부분의 바이에른인이 소아에 대해 막연하게 알고 있으나 “유대인 문제에 대한 마지막 해결책에” 관한 전챙에 대해서는 상당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커쇼는 "아우슈비츠로 가는 길이 증오에 의해 만들어졌고 무관심에 의해 길이 닦였다"고 비유했다.
 
대부분의 바바리아, 그리고 함축적으로 대부분의 독일인은, 쇼아에 무관심 있다는 커쇼의 평가는 이스라엘 역사학자 오토 도브 Kulka, 나치 독일의 여론에 대한 전문가 및 캐나다 역사학자 마이클 케이타 비판에 직면했다. 케이타는 커쇼가 반유대주의의 인기 정도를 경시했다고 주장했고, 나치 독일의 "자연스러운" 반유대주의가 행해지고 있다고 인정할 지라도 이러한 작업은 독일의 상당한 수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위로부터 단독으로 오는 것으로서 나치의 과도한 반유대주의를 보는 것은 옳지 않다. Kulka는 대부분의 독일인은 커쇼가 그들을 대중의견과 정치적 반대에서 묘사한 것보다 더 반유대적이라고 주장했고 오히려 "무관심", "수동적인 공모"가 독일인들의 반응을 묘사하는 더 나은 용어가 될 수 있다.
줄 113 ⟶ 180:
===동기===
 
독일의 역사학자 Hans Buchheim이 [[프랑크푸르트]]의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기소 측 전문 감정인으로서 활동했던 경험을 담아 1965년에 발간한 에세이 “Command and Compliance”에 따르면, [[아우슈비츠]] 내에서 유대인을 비롯한 수감자들을 살해하는데 있어 심도가해자들의 관련도자유의지를 없음에도침범하는 불구하고어떠한 SS친위대의강압적인 유대인명령도 학살지침을없었다고 충실하게한다.<ref 이행했다name = "Buchheim 1968 372_373">{{Harvnb|Buchheim|1968|pp=372–373}}.</ref> 이들의Buchheim은 유대인범죄나 학살은다름없는 “별다른 감정이나명령들은 목적은충분히 없지만회피할 체계적”이었다고기회가 묘사된다.있었다고 저술하며,<ref name = "KudryashovBuchheim 20041968 234372_373"/> 이러한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친위대 (나치)|SS친위대원]]들이 강제수용소에 수감되거나 처형당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ref>{{Harvnb|KudryashovBuchheim|20041968|p=234381}}.</ref> 게다가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가 그의 대원들에게 ‘모범적이고 예의바른’ 모습을 갖추길 강조한 만큼 SS친위대는 불필요한 가학행위는 오히려 지양하고 있었으며, 가학행위는 그들 중 특별히 잔인한 성향을 지녔거나 [[국가 사회주의]]에 과도한 충성을 증명해보이려는 개인들의 돌출행동 정도로 여겼다.<ref name = "Buchheim 1968 372_373"/> 마지막으로 Buchheim은 결백한 사람들 중 그런 길로 빠져버린 이들 역시 소속감을 유지하기위해, 또는 명령을 거부할 경우 동료로부터 ‘약자’로 취급받지 않기 위해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일 뿐 피할 수 없는 명령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ref>{{Harvnb|Buchheim|1968|pp=386–7}}.</ref>
 
1992년에 발간된 홀로코스트 사학자 Christopher Browning의 저서 “Ordinary Men: Reserve Police Battalion 101 and the Final Solution in Poland”에서 그는 유대인들을 체포하고 학살하며 수용소로 이송하던 임무를 수행한 경찰조직을 다뤘다. 101부대라 불린 이 경찰조직의 대원들은 대부분이 병역에 부적합한 [[함부르크]] 노동계급 출신의 동향 중년 남성들로, 학살에 대한 어떠한 교육도 받지 않았었다. 그리고 부대의 지휘관은 학살임무가 주어지면 이에 대해 불쾌감을 가지는 부대원들에게는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을 선택권을 주었다. 대신에 학살현장통제와 저지선형성 등의 간접적인 작업에만 참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500여명의 부대원 중 15명 미만의 대원만이 이를 선택하였고 절대다수는 학살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ref>{{Harvnb|Browning|1992|p=57}}.</ref>
 
후일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은 [[밀그램 실험|Milgram Experiment]]를 통해서, 응집력이 강력한 그룹 내에서는 인정받은 권위자가 내린 명령이 도덕적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하더라도 대다수의 개인은 이에 복종하듯이 따른다는 가설을 도출해내었다. 그리고 이에 큰 영향을 받은 Browning은 위의 101부대의 사례가 단순히 개인과 집단의 광기와 폭력성보다는 권위에의 복종(obedience to authority)이나 동류집단 압력(peer groop perssure)에 의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러시아의 역사가 Sergei Kudryashov는 죽음의 수용소에 필요한 간수들을 훈련하여 제공하던 SS친위대의 트라브니키 훈련소에 대해 연구해왔다. 이 트라브니키 간수들 중 일부는 [[포로수용소]]에서 벗어나기 위해 SS친위대에 자원한 공산권 출신 [[전쟁포로]]들도 있었다.<ref>{{Harvnb|Kudryashov|2004|pp=232–32}}.</ref> 사학자 Browning은 이러한 Hiwis(자원자)들은 반공의식과 [[반유대주의]]를 기준으로 선발되었으며 대부분이 [[우크라이나]] 혹은 [[발트 3국]] 출신이었다고 전한다.<ref name="Browning">{{웹 인용| url=http://hampshirehigh.com/exchange2012/docs/BROWNING-Ordinary%20Men.%20Reserve%20Police%20Battalion%20101%20and%20the%20Final%20Solution%20in%20Poland%20(1992).pdf | title=Arrival in Poland | publisher=Penguin Books | work=Ordinary Men: Reserve Police Battalion 101 and the Final Solution in Poland | date=1992; 1998 | accessdate=1 May 2013 | author=Christopher R. Browning | pages=52, 77, 79, 80 | format=PDF file, direct download 7.91 MB complete | quote=''Also:'' [http://www.webcitation.org/6GIJ2XpOy PDF cache archived by WebCite.]}}</ref> 그리고 Kudryashov는 이들이 대개 실제로는 반유대주의나 국가 사회주의에 별다른 애착이 없었다고 주장하며(Browning에 의해 확정되진 않음) 여전히 [[공산주의자]]로서 살았다고 한다.<ref name = "Kudryashov 2004 234">{{Harvnb|Kudryashov|2004|p=234}}.</ref>
 
그러나 트라브니키 간수들의 대다수는 반유대주의에는 관심도 관련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SS친위대의 유대인 학살지침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이들의 유대인 학살은 “별다른 감정이나 목적은 없지만 체계적”이었다고 묘사된다.<ref name = "Kudryashov 2004 234">{{Harvnb|Kudryashov|2004|p=234}}.</ref>
전부는 아닐지라도 일단 유대인 집단학살수용소에서 근무한 이 간수의 대다수는 기본적으로 각자 두 자리수 이상의 유대인을 살해했다.<ref>{{Harvnb|Kudryashov|2004|pp=234–5}}.</ref>
 
이 “트라브니키 사나이(Trawnikimänner)”들은 트라브니키(Trawniki)는 물론이고 아우슈비츠(Auschwitz)를 비롯해 베우제츠(Belzec), 소비버(Sobibór), 트레블링카 II(Treblinka II), 바르샤바(Warsaw)(3회), 쳉스토호바(Częstochowa), 루블린(Lublin), 리보프(Lvov), 라돔(Radom), 크라쿠프(Kraków), 비아위스토크(Białystok)(2회), 마이다네크(Majdanek) 등 “Final Solution"의 모든 주요현장에 파견되어 주도적으로 유대인 학살을 실시했다.<ref name="Browning">{{웹 인용|url=http://hampshirehigh.com/exchange2012/docs/BROWNING-Ordinary%20Men.%20Reserve%20Police%20Battalion%20101%20and%20the%20Final%20Solution%20in%20Poland%20(1992).pdf|title=Arrival in Poland|publisher=Penguin Books|work=Ordinary Men: Reserve Police Battalion 101 and the Final Solution in Poland|date=1992; 1998|accessdate=1 May 2013|author=Christopher R. Browning|pages=52, 77, 79, 80|format=PDF file, direct download 7.91 MB complete|quote=''Also:'' [http://www.webcitation.org/6GIJ2XpOy PDF cache archived by WebCite.]}}</ref><ref name="Jabłoński">{{웹 인용| url=http://www.trawniki.hg.pl/traw/obozjab.html | title=Hitlerowski obóz w Trawnikach | publisher=Trawniki official website | work=The camp history | accessdate=2013-04-30 | author=Mgr Stanisław Jabłoński (1927&ndash;2002) | language=Polish}}</ref>
 
===집단 학살 수용소===
줄 165 ⟶ 240:
|}
 
1942년, 아우슈비츠와 5개의 수용소들이 집단학살 수용소(Vernichtungslager)로 지정되어 라인하르트의 유대인 학살계획(Operation/Aktion Reinhard)을 수행하게 되었다.<ref name=aktr>{{웹 인용|url=http://www1.yadvashem.org/odot_pdf/microsoft%20word%20-%205724.pdf|title=Aktion Reinhard|publisher=Yad Vashem|format=PDF}}</ref><ref>Chełmno 수용소는 1941년 11월부터 집단학살을 개시했다.[http://www1.yadvashem.org/odot_pdf/microsoft%20word%20-%205915.pdf Yadvashem.org]</ref> 이중 [[나치 강제 수용소 목록|헤움노(Chełmno)]]<ref>Chełmno, 이 수용소는 [[T-4 작전|Euthanasia Program]]으로 이미 가스 트럭으로 장애인 학살을 실시하던 곳이었다. [[#CITEREFMontague2012|Montague 2012]], pp.&nbsp;9–48.</ref>와 [[나치 강제 수용소 목록|마이다네크(Majdanek)]] 두 수용소는 이미 충실한 노동 및 전쟁포로 수용소로서 기능하고 있었기에 단순히 학살기능만 추가하면 되었다. 그 외 [[나치 강제 수용소 목록|베우제츠(Belzec)]], [[나치 강제 수용소 목록|소비버(Sobibór)]], [[트레블링카 강제 수용소|트레블링카(Treblinka)]] 세 곳의 수용소는 오로지 유대인들을 더 많이 더 빨리 살처분하기 위한 목적만으로 건설되었다.

그리고 동일한 목적의 일곱 번째 수용소는 벨라루스의 말리 트로스티네츠(Maly Trostinets)에 건설되었고, 발칸반도의 야세노바츠(Jasenovac) 수용소에서는 주로 세르비아 민족이 처리되었다.

이 집단학살 수용소는 [[T-4 작전|나치정권의 눈엣가시(대개 공산주의자나 우생학적 불합격자)]]들이 유폐되고 노동착취를 당하던 [[다하우 강제 수용소|다하우(Dachau)]]나 [[베르겐-벨젠 강제 수용소|벨젠(Belsen)]] 등 독일 내부에 위치한 [[나치 강제 수용소|집단 수용소]]와 혼동되곤 한다. 하지만 이는 확실히 구분지어야 하며, 독일의 [[괴뢰 정권|괴뢰국]]들에 설립되어 전쟁포로를 비롯한 수감자들의 노동력을 강제로 착취하던 수용소들과도 역시 확실히 구별해야 한다.
[[파일:Rail leading to Auschwitz II (Birkenau).jpg|thumb|아우슈비츠 수용소로 향하는 철로]]
 
물론 모든 나치독일의 수용소에서는 기아와 질병 그리고 과로로 인해 굉장히 높은 사망률이 기록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집단학살 수용소는 기존의 수용소와는 달리 수감자의 대량학살만을 위해 설계된 수용소임을 명심해야 한다.
 
{{인용문|수용소의 화물적재램프로 기차가 유대인들을 실어온다. 하루에 한번, 많게는 다섯 번까지 불철주야 실어나른다. 사람들은 유럽의 가슴속에서 끊임없이 사라져가고, 앞서 도착했던 ‘화물’들의 운명을 알지 못한 채 이곳에 당도한다. 그리고 이 수라장에 놓인 이들은 - 나는 곧 일어날 일을 알고 있다 - 열에 아홉은 가스실에 놓일 것이다.|Rudolf Vrba, 1942.8.18에서 1943.6.7까지 아우슈비츠의 유태인수송램프에서 근무}}
 
이러한 집단학살 수용소는 [[친위대 (나치)|SS장교]]에 의해 운영되었지만, 대부분의 간수와 기간병들은 위에서 언급되었다시피 [[반유대주의]]와는 별 인연이 없는 [[우크라이나]]나 [[발트 3국]] 출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