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고타이 칸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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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두 ==
{{본문|카이두}}
 
=== 차가타이 칸국 정벌 ===
시레문의 음모가 발각되면서 우구데이계 왕자 대부분은 숙청되었지만 카이두는 몽케 칸에게 일찌감치 항복하여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목숨을 구한 카이두는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 힘을 기르는 데 주력하였다. [[1259년]], 몽케 칸이 [[남송]] 원정 중 사망하자 다음 해인 [[1260년]]에 그의 동생인 [[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케]]가 각각 대칸을 칭했다.
 
서로 대칸을 칭한 [[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케]]는 곧바로 전쟁에 들어갔다. 전쟁은 [[하북]]의 풍부한 물자를 가진 쿠빌라이에게 시종일관 유리하게 진행됐다. 이에 아리크 부케는 자신이 임명한 [[차가타이 칸국]]의 [[알루구]]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알루구는 이 요청을 거절하고 오히려 [[1263년]]에 쿠빌라이와 동맹을 맺었다. 쿠빌라이와 동맹을 맺은 알루구는 카이두가 아리크 부케를 도왔다는 구실로 카이두를 공격했다. 알루구의 공격을 받은 카이두는 [[킵차크 칸국]]의 [[베르케]]의 지원을 받아 차가타이 칸국의 영토로 침입하여 알루구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다음 번 전투에서 반격을 당해 본국으로 철수했다.
 
한편 몽골 초원에서는 [[1264년]]에 아리크 부케가 최종적으로 패하고 쿠빌라이가 유일한 대칸이 됐다. 최대의 경쟁자를 제거한 쿠빌라이는 이후 알루구와 협력하여 카이두 제거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던 [[1266년]]에 알루구가 죽고 알루구에 의해 쫓겨났던 [[무바라크 샤]]가 잠시 칸위를 차지했다가 곧 [[바락]]으로 교체됐다.
 
차가타이의 칸이 바락으로 교체되자 카이두는 다시 원정에 나섰다. 카이두는 킵차크 칸국의 만그 티무르의 지원을 받아 차가타이 칸국을 침입하여 시르다라강 근처와 코잔드에서 벌어진 두 번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 두 번의 전투에서 패한 바락은 [[트란속시아나]]<ref>현재의 [[우즈베키스탄]] 지역이다.</ref>로 도망친 뒤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를 약탈하여 군대를 다시 모았다. 바락의 격렬한 저항으로 전쟁이 장기화될 기미를 보이자 카이두는 배후의 쿠빌라이가 침입해올 것을 염려해 바락과 강화를 체결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강화<ref>[[1267년]]에 체결되었다고도 하고 [[1269년]]에 체결되었다고도 한다.</ref>의 결과 카이두와 만그 티무르가 트란속시아나의 3분의 1을 차지하게 됐으며 카이두는 차가타이 칸국이 소유하고 있던 [[투르키스탄]] 대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ref>이외에 이 강화의 결과로 카이두는 부하라 주변의 영토를 얻었고 사마르칸트와 같은 정주민 도시의 행정권은 이슬람 관료인 마수드 벡에게로 넘어갔다.</ref> 하지만 카이두는 강화대로 이 땅을 만그 티무르에게 주지 않고 자신의 영토로 병합시켰다.
 
강화는 체결되었지만 바락은 이 강화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부하라를 재정복하려 했으며 사마르칸트를 약탈하려고도 했다. 카이두는 바락의 이러한 불만을 이용하여 바락에게 [[아바카]]가 다스리고 있는 [[일 한국]]을 공격할 것을 종용했다. 바락은 이 제의에 쉽게 응하여 일 한국을 공격할 준비에 나섰다. 이에 카이두는 자신의 아들인 [[차파르]]가 이끄는 군대를 지원했으며 킵차크 한국 역시 군대를 지원했다. 킵차크 칸국과 카이두의 지원을 받은 바락은 아바카 휘하의 장수인 테구데르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한 뒤 군대를 일으켜 [[호라산]]에서 일 칸국의 군대를 격파했다.
 
하지만 킵차크 칸국과 카이두는 바락의 성공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이 때문에 킵차크 한국 군대는 바락 휘하의 장군인 자라일타이(Jalayirtai)와의 언쟁을 구실삼아 군대를 퇴각시켰다. 바락은 자라일타이를 보내 킵차크 한국 군대에 용서를 구하고 복귀할 것을 설득했지만 허사였다. 킵차크 한국의 군대가 떠나자 카이두가 보낸 차파르 역시 자신의 군대를 버리고 본국으로 도망가버렸다. 차파르가 도망오자 카이두는 아예 바락과의 관계를 끊고 아바카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설상가상으로 [[1270년]], 바락의 군대는 아바카와의 전투에서 대패를 당했고 바락은 부상을 입었다. 엄청난 손해를 본 채 본국으로 돌아온 바락은 카이두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카이두는 군대를 보내는 것으로 응답했다. 결국 [[1271년]], 바락은 카이두의 군대에 둘러싸인 채 막사에서 사망했으며 카이두는 죽은 바락 대신 네구베이(Negubei)를 차가타이 칸으로 세웠다.
 
하지만 차가타이 칸국은 녹록치 않았다. 알루구와 바락의 아들들을 중심으로 우구데이 칸국과 카이두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고 네구베이가 그들에 동조하면서 반란은 확산됐다. 이에 카이두는 군대를 보내어 네구베이를 죽이고 부카 테무르(Buqa Temur)를 칸으로 세웠다. 새로 칸이 된 부카 테무르는 무능하여 알루구와 바락의 아들들이 일으킨 반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결국 카이두는 [[1282년]]에 반란 세력과 타협하여 바락의 아들인 [[두아]]를 칸위에 올렸다. 칸위에 오른 두아는 오고타이 칸국에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카이두를 따르게 됐으며 카이두는 더 이상 차가타이 칸국을 걱정하지 않게 됐다.
 
=== 원나라와의 대립 ===
평소 오고타이 칸국을 껄끄럽게 생각하고 있던 쿠빌라이는 자신의 넷째 아들인 노무간에게 대군을 주어 오고타이 칸국과 맞서게 했다. 이 원정군에는 몽케의 아들인 시리기(Sirigi), 아리크 부케의 아들인 요부쿠르, [[멜릭 테무르]]가 있었는데, 이들은 [[1276년]]에 진중 반란을 일으켜 노무간을 사로잡은 뒤 킵차크 한국에 넘겨 버리고 자신들은 카이두에게 의탁했다. 이후 차가타이의 둘째아들 사르반(Sarban)도 이 세력에 합류하여, 네 명의 왕자와 킵차크 한국 및 카이두가 반 쿠빌라이 연합을 형성하게 됐다.
 
[[1277년]] 카이두는 자신에게 의탁한 시리기와 사르반 등을 앞세워 [[카라코룸]] 진격에 나섰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쿠빌라이는 즉시 명장 [[바얀]]을 불러 이들을 막게 했다. 바얀은 [[남송]]과의 전투에서 보여줬던 뛰어난 용병술을 바탕으로 그들의 군대를 격파했다. 바얀에 의해 진 뒤 왕자들은 내분을 일으켰으며 결국 사르반이 시리기를 넘기는 대가로 바얀에게 항복하면서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1년 뒤인 [[1278년]]에는 킵차크 한국에 붙잡혀 있던 노무간마저 풀려나고 말았다.
 
[[1287년]], 카이두는 만주와 동몽골을 영지로 하는 카사르의 후손 식투르, 카치운의 후손 카다안, 테무게 옷치긴의 후손인 [[나얀]]<ref>이 셋을 소위 동방 3왕가라고 한다.</ref>과 동맹을 맺고 다시 쿠빌라이와의 전쟁에 나섰다. [[1388년]], 동쪽 군대의 맹주인 나얀은 쿠빌라이의 친위대와 결전을 벌였으나 패하고 쿠빌라이에 의해 처형당했다. 나얀이 패한 이후 대부분의 반란 가담 세력들은 쿠빌라이에 항복하였다. 동쪽 반란군과 함께 진군했던 카이두는 쿠빌라이의 손자인 가말라를 격파하는 등 우세한 전황을 유지했지만 나얀을 평정한 쿠빌라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본국으로 회군하였다. 이 원정이 실패한 후 카이두는 산발적 전투를 몇 번 더 벌였으나 [[바얀]]의 방어에 막혀 큰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1294년]], 원나라를 건국한 쿠빌라이가 사망하고 그의 손자 테무르 올제이투가 제위에 올라 성종이 됐다.<ref>몽고식으로는 테무르 올제이투 칸, 중국식으로는 성종으로 부른다.</ref> 그로부터 3년 뒤인 [[1297년]], 아리크 부케의 아들인 요부쿠르와 몽케의 손자 울루스 부카가 오고타이 칸국을 이탈하여 원나라로 귀환하였고 이로 인해 카이두의 세력은 크게 줄어들었다.<ref>이들은 쿠빌라이의 지배가 싫어서 원나라를 이탈한 것이었기 때문에 쿠빌라이가 죽은 뒤 다시 원으로 복귀했다.</ref> 이후 카이두는 지속적으로 원을 공격하였고 [[1298년]]에는 성종의 사위인 쾨르기즈를 붙잡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의 세력이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데에 대해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카이두는 [[1301년]] 아리크 부케의 차남 멜릭 테무르, 차가타이 칸국의 칸 두아와 함께 역대 최대 규모의 원정에 나섰다. 전쟁 초기엔 카이두의 군대가 우세하여 가말라와 그의 아들 예순 테무르<ref>후에 원나라 6대 황제인 진종이 된다.</ref> 군대를 압도했지만 카이샨<ref>후에 원나라 3대 황제인 무종이 된다</ref>의 군대가 전장으로 지원되면서 전황은 급속도로 변했다. 차가타이 칸국의 칸인 두아는 전투 중 부상을 당해 본국으로 퇴각했고 카이두는 전투 중 입은 부상 때문에 사망하고 말았다.
 
== 카이두 이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