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하 경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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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의 수도는 흥경부(興慶府)로 정해졌다. 송의 관례를 모방해 관위 제도를 정비하고 문·무관의 복식을 정하였으며, 천수예법연조(天授礼法延祚)라는 독자적인 연호와 함께 학교를 지어 교육을 장려하고, 군비를 증강하여 국가의 기반을 다졌다.
 
송과 [[요나라|요]]에 대항하여대항하면서 [[오르도스]] 중의 [[간쑤]](甘肅) 서부지방을 점령했다. 남으로는 [[란저우]](蘭州)를 점령하고 [[토번]](吐蕃)과 싸워 사방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서하의 번영을 구가하였다. 한편 송과의 전투에서 송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였으나, 송과의 교역을 위해 천수예법연조 7년([[1044년]]) 송에 신하의 예를 갖추는 대신, 관영 무역장에서의 교역 허가 및 송으로부터 매년 [[은]] 5만 냥 · [[차]] 2만 근 · 견(絹) 13만 필을 세폐(歲幣)로 받아 가는 것으로 양국간에 강화가 성립되었다. 만년에는 오늘날 [[서하문자]]라 불리는 고유한 문자를 만들어, 서하의 문화 향상에 힘썼다.
 
그러나 술에 빠져 서하가 어지러워지는 한 원인이 되기도 했으며, 황후 야리 씨(野利氏)와 그 소생의 태자 이영명(李寧明, 영녕가寧令哥)를 폐하고 천수예법연조 11년([[1048년]])에는 영명을 죽이고 만다. 그 해에 이원호 역시 사망하였다. 향년 46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