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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지마'''({{llang|ja|出島}})란 [[1634년]] [[에도막부]]의 [[쇄국정책]]의 일환으로 [[나가사키 시|나가사키]]에 건설된 [[인공섬]]이다. 부채꼴모양의 섬으로, 전체넓이는 약 1.3ha정도이다. [[1641년]]부터 [[1859년]]동안 대 [[네덜란드]] 무역은 오직 이곳에서만 독점적으로 허용되었으며, 쇄국일본 시기에 서양과의 교류라는 숨통을 터놓았던 상징적인 장소이다. 당시 일본은 1년에 한 번 쇼군에게 국제 흐름을 설명하는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서 서양을 이해했다. 일본이 [[네덜란드]] 상인들에게만 교류를 허락한 이유는 [[개신교네덜란드]] 신자인상인들의 네덜란드 상인들은관심사는 [[가톨릭일본]]과의 국가인무역으로 에스파냐와이익을 포르투갈과는남기는 달리것이지, [[그리스도교]] 선교에 관심이전도가 없었기아니었기 때문이다.<ref>《먼나라 17세기이웃나라》2권-일본의 당시역사 개신교는편/이원복 [[로마 가톨릭]] [[추기경]]이 비평할 정도로 선교에 관심이 없었다.글·그림/김영사</ref>
 
== 역사 ==
데지마는 [[1634년]]부터 2년에 걸쳐 [[포르투갈인]]들을 수용하기 위한 시설로서 막부가 나가사키의 町衆(부유한 상공업자)들에게 건설을 명하여 만들어졌다. 건설비용은 우선 건설을 담당한 업자들이 부담하게 하고, 나중에 입주할 포르투갈인(후에 네덜란드인)들에게 토지사용료(임대료)를 업자들에게 매년 지불하는 형식으로 건설비용을 보상받도록 하였다.
 
[[1639년]] [[로마 가톨릭]] 선교활동을 하는 포르투갈인 추방후에 [[1641년]] [[히라도]]에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상관(商館)을 이곳으로 옮기고 네덜란드인들을 거주시켰다. 이후, 약 200년동안 네덜란드인과의 통상활동및 일본내 활동에 대한 막부의 통제가 이루어졌다. 원칙적으로 공무상 출입이 허용된 일본의 관리이외에는 출입이 금지되었고, 네덜란드인도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일본체류기간동안 좁은 데지마안에서만 지내야 했다. 하지만,실제로는 일본여성과 결혼하는등 자유롭게 생활했다고 한다. [[1855년]] [[일란화친조약]]체결에 의하여 네덜란드인의 [[나가사키 시]]로의 자유로운 출입이 허가되고 나서, 그 존재가치가 유명무실해졌으며, [[1859년]] 데지마내의 네덜란드 공관은 폐쇄되었다.
 
== 의의 ==
쇄국일본의 유일한 서양과의 교류창구였으며, 네덜란드 상관에 부임한 엥게르벨트 캠벨과 칼 튠베리크 그리고 시볼트등의 네덜란드인들은 일본의 문화및 동·식물을 그들의 고국에 소개했다.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실학을[[실학]]을 장려하고, 양서를 해금조치한 결과, 데지마를 통해 입수된 서양서적들은 의학,천문역학등의 연구를 촉진시켰다. 난학을[[난학]]을 통하여 탄생한 합리적사고및합리적 사고및 인간평등사상등은 막부말기의 일본에 커다란 사상적 영향을 끼쳤다.
 
== 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