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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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트라키아 지방의 스타게이로스(이오니아의 식민도시)에서스타게이라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니코마코스는 마케도니아 왕 아민타스 2세의 시의(侍醫)였고, 모친인 파이스티스는 칼키스의 이민 출신이다. 왕자 [[필리포스 2세|필리포스]]의 소꿉동무로 궁정에서 자랐으나 어려서 양친을 여의어 연고자인 프록세노스가 후견인이 되었다. 17세 때(전 367)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 입문하였다. 이후 [[플라톤]]의 사망시까지 약 20년간 그곳에서 연구에 정진, 학생 지도도 담당하였다. 이오니아 문화를 배경으로 의가(醫家)의 실증정신(實證精神) 아래 성장한 그에게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은 큰 영향을 주었다. 충실한 플라토니스트로서 출발한 그는 맹렬한 이데아 비판을 하면서도 거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의 연구와 교수(敎授) 및 저작 활동은 대략 3기―아카데미아기(期)와 편력기(遍歷期)와 학두기(學頭期)―로 나눌 수 있다.
그의 연구와 교수(敎授) 및 저작 활동은 대략 3기―아카데미아기(期)와 편력기(遍歷期)와 학두기(學頭期)―로 나눌 수 있다. 아카데미아기―저작은 기원전 360년경부터 시작된다. 먼저 플라톤의 대화편을 본떠서 ⟪그릴러스⟫ ⟪유디머스⟫ ⟪프로트렙티커스⟫(철학에의 권유) ⟪향연(饗宴)⟫ ⟪소피스트⟫ ⟪정치가⟫ ⟪메닉시너스⟫ 등 많은 대화편과 기타 글이 씌어져 간행되었다. 동시에 자연학을 비롯하여 그 밖의 연구도 시작되어 ⟪자연학⟫의 일부(제1, 2, 7권) ⟪천체론(天體論)⟫ 제1권과 ⟪정치학⟫ 제2권의 일부, ⟪데 아니마⟫ 제3권과 ⟪논리학⟫의 일부(⟪토피카⟫ 등)와 ⟪형이상학⟫(제12권) 등이 씌어졌다.
 
그의 연구와 교수(敎授) 및 저작 활동은 대략 3기―아카데미아기(期)와 편력기(遍歷期)와 학두기(學頭期)―로 나눌 수 있다. 아카데미아기―저작은 기원전 360년경부터 시작된다. 먼저 플라톤의 대화편을 본떠서 ⟪그릴러스⟫ ⟪유디머스⟫ ⟪프로트렙티커스⟫(철학에의 권유) ⟪향연(饗宴)⟫ ⟪소피스트⟫ ⟪정치가⟫ ⟪메닉시너스⟫ 등 많은 대화편과 기타 글이 씌어져 간행되었다. 동시에 자연학을 비롯하여 그 밖의 연구도 시작되어 ⟪자연학⟫의 일부(제1, 2, 7권) ⟪천체론(天體論)⟫ 제1권과 ⟪정치학⟫ 제2권의 일부, ⟪데 아니마⟫ 제3권과 ⟪논리학⟫의 일부(⟪토피카⟫ 등)와 ⟪형이상학⟫(제12권) 등이 씌어졌다.
편력기―플라톤이 죽기(전 347) 직전 아리스토텔레스는 참주 헤르미아스의 초청으로 아타르뉴스로 갔다. 아카데미아 학두에 취임한 [[스페우시포스]]의 수학주의(數學主義), 피타고라스주의에 만족하지 못한데다 올린토스의 함락으로 아테네에 반(反)마케도니아 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강대한 군대를 가지고 있던 참주의 보호 아래 왕의 질녀인 피티아스와 결혼하여 그 곳 가까운 아리스에 살면서 3년간을 강의와 연구로 보냈다. 학우인 에라스토스와 코리스코스도 같이 참가하였다. 여기에서 ⟪철학에 대하여⟫를 썼고 이데아나 이데아 수(數)의 비판이 시작되었다. 또 ⟪형이상학⟫ 제1, 2, 4, 5권과 ⟪유디머스 윤리학⟫(미완), ⟪자연학⟫ 제3-6권, ⟪천체론⟫(현재의 형태), ⟪생성소멸론⟫ 등을 썼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플라톤의 수제자 중 한 사람으로 레스보스 태생인 [[테오프라스토스]]의 알선으로 미치레네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이곳에서는 특히 생물학에 대한 연구가 발전되어 있었다.
 
편력기―플라톤이 죽기(전 347) 직전 아리스토텔레스는 참주 헤르미아스의 초청으로 아타르뉴스로 갔다. 아카데미아 학두에 취임한 [[스페우시포스]]의 수학주의(數學主義), 피타고라스주의에 만족하지 못한데다 올린토스의 함락으로 아테네에 반(反)마케도니아 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강대한 군대를 가지고 있던 참주의 보호 아래 왕의 질녀인 피티아스와 결혼하여 그 곳 가까운 아리스에 살면서 3년간을 강의와 연구로 보냈다. 학우인 에라스토스와 코리스코스도 같이 참가하였다. 여기에서 ⟪철학에 대하여⟫를 썼고 이데아나 이데아 수(數)의 비판이 시작되었다. 또 ⟪형이상학⟫ 제1, 2, 4, 5권과 ⟪유디머스⟪에우데모스 윤리학⟫(미완), ⟪자연학⟫ 제3-6권, ⟪천체론⟫(현재의 형태), ⟪생성소멸론⟫ 등을 썼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플라톤의 수제자 중 한 사람으로 레스보스 태생인 [[테오프라스토스]]의 알선으로 미치레네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이곳에서는 특히 생물학에 대한 연구가 발전되어 있었다.
기원전 342년에는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의 의뢰와 헤르미아스의 추천을 받아 알렉산드로스 왕자의 가정교사로서 [[미에자]]로 갔다. 왕자를 위하여 [[호메로스]]를 가르쳐 주었고 ⟪호메로스 문제⟫를 썼다. 또 ⟪군주정치론⟫ ⟪식민정책론⟫도 저술하였다. 기타 그리스인에 관한 국가제도의 수집이나 기록을 하였다. 그 일부인 ⟪아테네인의 국제(國制)⟫의 태반이 1891년에 재발견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헬라스의 통일, 즉 그리스의 폴리스군과 마케도니아 제국의 통일에 열심인 애국자였고 이것이 필리포스 2세의 야심에 합치한 듯하나, 후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서융합책에는 동의하지를 못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우정은 변하지 않아 알렉산드로스는 동정(東征) 중 생물학상의 표본을 위시하여 다른 선물을 보냈다고 한다. 기원전 340년 알렉산드로스는 섭정(攝政)이 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타게이로스로 물러가 연구생활을 계속하였다. 기원전 338년 그리스 연합군이 카이로네이아에서 패배, 기원전 336년 필리포스왕은 암살되고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알렉산드로스]]가 즉위하였다. 이듬해인 기원전 335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재차 아테네로 돌아왔다.
 
기원전 342년에는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의 의뢰와 헤르미아스의 추천을 받아 알렉산드로스 왕자의 가정교사로서 [[미에자]]로 갔다. 왕자를 위하여 [[호메로스]]를 가르쳐 주었고 ⟪호메로스 문제⟫를 썼다. 또 ⟪군주정치론⟫ ⟪식민정책론⟫도 저술하였다. 기타 그리스인에 관한 국가제도의 수집이나 기록을 하였다. 그 일부인 ⟪아테네인의 국제(國制)⟫의 태반이 1891년에 재발견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헬라스의 통일, 즉 그리스의 폴리스군과 마케도니아 제국의 통일에 열심인 애국자였고 이것이 필리포스 2세의 야심에 합치한 듯하나, 후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3세 메가스|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서 융합 동서융합책에는정책에는 동의하지를 못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우정은 변하지 않아 알렉산드로스는 동정(東征) 중 생물학상의 표본을 위시하여 다른 선물을 보냈다고 한다. 기원전 340년 알렉산드로스는 섭정(攝政)이 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타게이로스로 물러가 연구생활을 계속하였다. 기원전 338년 그리스 연합군이 카이로네이아에서[[카이로네이아 전투|카이로네이아]]에서 패배, 기원전 336년 필리포스왕은필리포스 왕은 암살되고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알렉산드로스]]가알렉산드로스가 즉위하였다. 이듬해인 기원전 335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재차 아테네로 돌아왔다.
학두기(學頭期)―마케도니아의 총독 [[안티파트로스]]의 원조로 아테네 동쪽 교외인 아폴론 리케이오스 성역(聖域) 중 일반에게 공개하는 김나시온(體育所)을 빌려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리케이온]]이라 불리었는데 이곳에서 12년간 강의와 연구로 세월을 보냈다. 오전에는 상급반 연구자를 위하여 논리학과 제1차 철학을 강의하였고, 오후에는 수사학(修辭學)(辯論術), 정치학, 윤리학 공개 강의를 하였다. 현존하는 저작의 대부분은 이 학두기의 강의 초고이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이 전하여지자 반마케도니아 운동이 재연(再燃)되었다. 마케도니아와 관계가 깊었던 그는 불경죄로 문책을 받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사전에 모친의 고향인 [[칼키스]]로 떠났다가 이듬해 위장병으로 63세의 생애를 마쳤다.
 
학두기(學頭期)―마케도니아의 총독 [[안티파트로스]]의 원조로 아테네 동쪽 교외인 아폴론 리케이오스 성역(聖域) 중 일반에게 공개하는 김나시온(體育所)을김나시온을 빌려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리케이온]]이라 불리었는데 이곳에서 12년간 강의와 연구로 세월을 보냈다. 오전에는 상급반 연구자를 위하여 논리학과 제1차 철학을 강의하였고, 오후에는 [[수사학(修辭學)(辯論術)]], 정치학, 윤리학 공개 강의를 하였다. 현존하는 저작의 대부분은 이 학두기의 강의 초고이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이 전하여지자 반마케도니아 운동이 재연(再燃)되었다. 마케도니아와 관계가 깊었던 그는 불경죄로 문책을 받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사전에 모친의 고향인 [[칼키스]]로 떠났다가 이듬해 위장병으로 63세의 생애를 마쳤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도움으로 리케이온 학교에 도서관을 만들어 많은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세계 최초의 동물원도 만들었다. 신학자들은 그의 책이 자기들의 생각과 일치하였으므로 학문의 기초로 삼았다. 이 밖에도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의 기초를 세웠으며, 법률과 도덕도 연구하였다. 그는 스승 플라톤이 관념론적 이상주의임에 대하여 경험론적 현실주의자로 지적되고 있으며, 예술에 관해서도 플라톤과 다른 의견을 내세우고 있다. 예술을 일종의 '모방'으로 보는 점은 플라톤과 같으나, 플라톤이 '모방의 모방'으로 생각하여 이데아의 참된 인식을 흐려 놓는 것으로 인정한 데 비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신을 카타르시스(정화)시키는 것으로 보았다.<ref>{{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2|제목=인명사전/세계인명/ㅇ/아리스토텔레스}}</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