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천 (1888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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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학을 떠나기 앞서 1908년 3월 중 아버지 김정우가 작고하였다.<ref name="die">[http://webviewer.nl.go.kr/imageviewer_web/imageviewer.jsp?control_no=CNTS-00048774678 파병호장(派兵護葬)] 황성신문(皇城新聞) 1908-03-17 / 02면 03단 ●派兵護葬 前副領 金鼎禹氏가 因病長逝야 去十四日에 葬禮를 舉行 軍部에셔 兵丁一小隊를 泒送護葬얏다더라</ref>
유학을 떠나기 직전인 1908년 7월말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자신의 재산인 전답, 가옥, 산판(山坂)을 나열하고, 자신이 일본 유학을 떠나면서 문권(文券)을 다 가지고 가니, 내외국인은 사기 당하지 말라는 광고를 두 차례 내었다. 당시 재산 목록을 보아 부친 사후 상당한 재산을 상속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ref name="pro">[http://webviewer.nl.go.kr/imageviewer_web/imageviewer.jsp?control_no=CNTS-00068023299 本人이 日本에 留學오무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8년 07월 24일 광고(廣告) 03면 4단<br>[http://webviewer.nl.go.kr/imageviewer_web/imageviewer.jsp?control_no=CNTS-00048968477 本人이 日本에 留學오무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8년 07월 25일 광고(廣告) 03면 7단</ref>
 
[[File:김경천 회견기 1923-07-29.jpg|thumb|right|200px| 동아일보 1923-07-29 일자에 실린 김경천 장군 회견기 : 빙설(氷雪) 싸힌 서백리아(西伯利亞)에서 홍백전쟁(紅白戰爭)한 실지경험담(實地經驗談), 아령조선군인(俄領朝鮮軍人) 김경천(金擎天)<ref name="donga"/>]]
그가 일본 유학중인 1910년 초에 아버지의 별실(別室) 화순(和順)집이 부친 소유 동대문 등지의 채전(菜田)을 전군부대신(前軍部大臣) [[윤웅렬|윤웅렬(尹雄烈)]]에 위탁하여 상당 금액을 받고 매각하여, 김정우의 며느리(李召史)가 윤씨에게 진정서를 내었다는 기사가 황성신문에 난 것으로 보아 부친의 유산을 두고 집안에 다툼이 상당히 있었던 것 같다.<ref>[http://webviewer.nl.go.kr/imageviewer_web/imageviewer.jsp?control_no=CNTS-00048192541 李召史情愿] 황성신문(皇城新聞) 1910-02-03 雜報 03면 03단 / ●李召史情愿 故副領金鼎禹氏의 所有菜田이 東門外等地에 在더니 金氏死後에 其別室和順집이 該田을 前軍部大臣尹雄烈氏에게 委托야 金貨四萬▣에 放賣 故로 金氏의 子婦李召史가 右金을 推尋次로 尹氏에게 情願書를 致送얏 其辭意가 令人落淚다더라.</ref> 부친 김정우는 군부대신 윤웅렬의 부관을 지냈다고 한다.<ref name="yun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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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19년]] 연말 경에 김경천은 만주 삼원포를 떠나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렀다.<ref>[http://e-gonghun.mpva.go.kr/portal/url.jsp?ID=PV_JS_0005_00000081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5) 國外情報 : 不逞鮮人의 行動 : 포조(浦潮) 파견원 보고 (派遣員 報告)] (1920-01-23 공훈전자사료관) p.1 하얼빈(哈爾濱) 거주 김경천이 포조(浦潮, 블라디보스톡)에 왔다고 함./ [https://www.jacar.archives.go.jp/aj/meta/MetSearch.cgi?IS_KEY_S1=%E9%87%91%E6%93%8E%E5%A4%A9&SUM_KIND=SimpleSummary&IS_KIND=detail&IS_SCH=META&IS_STYLE=default&DB_ID=G0000101EXTERNAL&GRP_ID=G0000101&IS_START=1&IS_EXTSCH=&DEF_XSL=default&IS_SORT_KND=ASC&IS_SORT_FLD=&IS_TAG_S1=InD&IS_NUMBER=1&SUM_NUMBER=20&SUM_START=1&IS_LYD_DIV=&LIST_VIEW=&_SHOW_EAD_ID=M2007050114242171777&ON_LYD=on 密第102号 其688 不逞鮮人之の行動] 大正9年1月23日(1920/01/23)「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6031147600、大正8年乃至同10年共7冊其5朝鮮騒擾事件関係書類(密受第102号情報其他3内其2)陸軍省(防衛省防衛研究所)」</ref> 그는 이곳에서 의용군을 모집하여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중국인 마적단과 싸웠으며, 창해청년단(滄海靑年團)의 단장 김규면(金圭冕, 1880-1969)<ref>[http://www.mpva.go.kr/narasarang/gonghun_view.asp?id=9004&ipp=50 김규면(金圭冕. 1880. 3.12 ~ 1969. 2. 2) 건국훈장 (2002)]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br>[https://search.i815.or.kr/Ruin/RuinforeignView.jsp?id=RU098102 김규면(1880~1969) 묘소] 독립운동유적지 국외, 독립기념관<br>[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8777 김규면(金圭冕. 1880-1969)]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f>에 이어 총사령관을 맡아 전투를 거듭하면서 [[시베리아]] 지역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ref>[http://e-gonghun.mpva.go.kr/portal/url.jsp?ID=PV_JS_0003_00000020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3) 國外情報 : 露領의 不逞鮮人 狀況] (1921-01-19 공훈전자사료관) p.22 : 창해청년단 단장(滄海靑年團 團長) 김규면(金圭冕, 1880-1969), 참모장(參謀長) 정재관(鄭在寬), 총지휘관(總指揮官) 김경천(金敬天)<br>
[http://e-gonghun.mpva.go.kr/portal/url.jsp?ID=PV_JS_0003_00000020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5) 國外情報 : 露領의 不逞鮮人 狀況] (1921-01-19, 공훈전자사료관) p.22</ref> [[1921년]]에는 수청(水淸)의병대의 지도자가 되었고<ref>오늘날의 연해주 [https://ko.wikipedia.org/wiki/%ED%8C%8C%EB%A5%B4%ED%8B%B0%EC%9E%94%EC%8A%A4%ED%81%AC 파르티잔스크] 원래 명칭은 스찬이며 수청(水淸, 水靑), 소성(蘇城)으로도 불렸다. [https://search.i815.or.kr/Ruin/RuinforeignMov.jsp?nKey=RU012&nSeq=0 빨치산스크]라고도 한다.</ref> 러시아의 혁명 세력과 연합하면서 [[연해주]] 지역의 조선인 지도자로 [[소련]]의 인정도 받게 되었다. 공민(公民) [[나경석|나경석(羅景錫,1890∼1959)]]이 1922년 1월 동아일보에 연재한 "노령견문기(露領見聞記)" 5회와 6회에 당시 그의 활동을 보도하고 있다.<ref name="gongmin">[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201230020920100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2-01-23&officeId=00020&pageNo=1&printNo=513&publishType=00020 노령견문기(露領見聞記) (五) : 8. 경천 김장군(八. 警天 金將軍)] 1922.01.23 동아일보 1면<br>[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201240020920100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2-01-24&officeId=00020&pageNo=1&printNo=514&publishType=00020 노령견문기(露領見聞記) (六) : 8. 경천 김장군(八. 警天 金將軍) 속(續)] 1922.01.24 동아일보 1면</ref>
[[File:노령견문기(5)의 김경천 1922-01-23.jpg|thumb|left|200px| 동아일보 1922년 1월 23 일자에 실린 공민(公民) [[나경석|나경석(羅景錫,1890∼1959)]]의 "노령견문기(露領見聞記)" 5회 중의 경천(擎天) 김장군(金將軍)<ref name="gongmin"/>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EB%85%B8%EB%A0%B9%EA%B2%AC%EB%AC%B8%EA%B8%B0(6)%EC%9D%98_%EA%B9%80%EA%B2%BD%EC%B2%9C_1922-01-24.jpg?uselang=ko 노령견문기 6회분])]]
 
[[File:김경천 회견기 1923-07-29.jpg|thumb|right|200px| 동아일보 1923-07-29 일자에 실린 김경천 장군 회견기 : 빙설(氷雪) 싸힌 서백리아(西伯利亞)에서 홍백전쟁(紅白戰爭)한 실지경험담(實地經驗談), 아령조선군인(俄領朝鮮軍人) 김경천(金擎天)<ref name="donga"/>]]
[[1922년]] 수청의병대는 [[대한혁명단]]으로 개칭하였으며, 김경천은 사령관을 맡았다. 그해 말에는 [[고려혁명군]](사령관 [[김규식 (북로군정서)|김규식]])이 조직되었고 김경천은 동부사령관을 맡았다. 그러나 이후 정세 변화로 러시아 지역에서의 독립 운동이 소강 상태에 빠지면서, 노령(露領) 무장 독립 운동의 선도격이던 그의 입지는 좁아졌다. 1923년 상해에서 상해임시정부를 개편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될 때 군사담당 위원으로 내정되었다. 김경천은 상해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했다. [[1923년]] 이후로는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고려사범대학]]에서 강의를 하였고 국경경비대의 장교로 일했다는 정도만이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