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욱 납치 암살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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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미국에 있던 김형욱은 1977년에 [[박동선 (1935년)|박동선]](朴東善, 1935~ ) 코리아 게이트 사건이 터지자 미국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두하여 박정희 정권의 비밀스런 사건들을 폭로하였다. 하지만 그에 멈추지 않은 채 [[김형욱]]은 곧이어 [[일본]]에서 회고록을 발표하자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는 당시 제8대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金載圭, 1926~1980)에게 [[김형욱]]을 없애라고 지시하였다.
*다른의견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10.26 사건때 김재규를 강도높게 조사했으나 김형욱에대한 말은 한마디 들을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김재규 변호인도 같은 증언을 함증언 김경재의원이 쓴 김형욱회고록에 의하면 박정희의 지시는 없었다고 한다
 
그 와중 1979년 10월 1일, 미국에 있던 김형욱은 당시 중앙정보부 제1차장 [[윤일균]](尹鎰均, 1926~ )으로부터 [[프랑스]] [[파리 (프랑스)|파리]]로 가라는 통보를 받고 1979년 10월 4일, 파리로 갔다가 1979년 10월 7일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공작원으로 보낸 중앙정보부 연수생 3명에게 납치 암살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프랑스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 공사 [[이상열 (1929년)|이상열]](李相悅, 1929~2006)도 [[김재규]] 중앙정보부 부장의 사주를 받고 현장 지휘 및 방조한 것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