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학 (1856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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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학'''(鄭在學, [[1856년]] [[6월 22일]] ~ [[1940년]] [[4월 2일]])은 [[일제 강점기]]의 기업인으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 생애 ==
[[1897년]] [[탁지부]] 참서관을 지내고 [[1905년]]과 [[1908년]]에는 경북 순흥군(현 [[영주시]])과 개령군(현 [[김천시]]) 군수에 임명되는 등 [[대한제국]]에서 관리를 맡기도 했으나, 이후 [[대구광역시|대구]]와 [[경상북도]]를 대표하는 대자본가로서의 활동이 더욱 두드러진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도 [[조선총독부]] 소속 개령군수로 계속 그 자리를 지켰으며, [[1911년]] 도지사 자문 직책인 경북 도참사를 지냈다. 1910년 한일합방한일 병합 직후 은사금 1천엔을 하사받고 정8위에 서위되어 일제로부터 공을 인정받았다.
 
[[1911년]]에 경상농공은행 감사역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지역 금융계와 산업계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1912년]] 선남은행 취체역, [[1913년]] 대구지주조합 설립위원과 대구전업주식회사 감사역 겸 취체역, [[1915년]] [[조선식산은행]] 상담역, [[1919년]] 계림농림주식회사 상담역, [[1921년]] [[대구은행]] 은행장과 대흥전기 감사, [[1929년]] 경상합동은행 이사 및 은행장과 조선미곡 대표이사, [[1929년]] 수성수리조합 조합장 등 경력이 화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