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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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현'''(金寬鉉, <small>일본식 이름:</small> 金光副臣<ref>
{{서적 인용
|저자=백기완, 송건호, 임헌영
|제목=해방전후사의 인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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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f>, [[1877년]]?<ref>
《조선인사흥신록》에는 1877년생으로[[1877년]]생으로, 《조선공로자명감》에는 [[1880년]] 생으로 기록되어 있다.</ref> ~ ?)은 [[대한제국]]의 무관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다.
 
== 생애 ==
 
[[경기도]] 또는 [[충청남도]] 연산<ref>
[[경기도]] 또는 [[충청남도]] 연산<ref>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에는 "충청남도 연산"이라 한다.</ref> 출신으로 [[1894년]] [[일본]] 유학생으로 뽑혀 [[게이오기주쿠 대학|게이오의숙]]에서 수학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보병 장교로 교육을 받았다. [[노백린]]·[[어담]]·[[윤치성]](尹致晟) 등과 함께 [[1900년]] 일본육사 제11기생으로 졸업했다. 육군 보병 참위로 임관한 뒤, 도야마(戶山) 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만주]]로 발령을 받아 보병정위(步兵正尉)로 [[러일 전쟁]]에 참전하여 공을 세우고 일제로부터 종군기장(從軍記章)과 전공금(戰功金) 1천5백원을1천5백 원을 받았다.
 
일본은 그를 귀국시켰고 [[1905년]] [[유길준]] 등과 함께 역모혐의를 받았으나 곧 풀려났고 [[대한제국]] 군대의 장교로 일하게 하면서, 내부의 참서관(參書官)·서기관, 광제원장(廣濟院長), 내부 회계국장, 위생과장, 남양군수 등의 행정 관료직을 거쳤다.
 
[[1910년]] [[한일 합방병합 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총독부]]가 행정권을 장악하자 경기도 [[수원시|수원군]] 군수에 임명되었고, 이후 도 참여관과 지사를 지내며 친일 관료로서 활동했다. [[1917년]] [[함경남도]] 참여관을 시작으로 [[전라남도]] 참여관(1918), [[충청남도]] 지사(1921), [[함경남도]] 지사(1924)를 역임했다. [[1926년]] 퇴관과 동시에 중추원의 칙임참의가 되었다.
 
[[1924년]] 일본 정부로부터 훈3등 서보장을 서훈 받는 등 공로를 인정 받았고, [[1934년]]부터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직에 앉았다. 그는 [[1926년]] 관직에서 물러났는데, 이후로는 토지의 개량을 통한 산미 증식을 추진하는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 고문으로 근무했고, [[1937년]]에는 중추원에서 조직한 화북장병위문대에 가담하여 [[장직상]] 등과 함께 중국 전선의 일본군 위문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뒤 1945년까지 여러차례 참의직을 중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