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니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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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기로에 의하면, 도미니코는 음식을 먹을 때 육류를 피했으며,<ref>{{harv|Guiraud|1913|p=156}}</ref> 정해진 단식 시간과 침묵 시간을 준수했고,<ref>{{harv|Guiraud|1913|p=116}}</ref> 사치스러운 침소를 피하고, 될 수 있는 한 가장 누추한 거처와 가장 초라한 옷을 선택했다고 한다.<ref name="Guiraud 1913 130">{{harv|Guiraud|1913|p=130}}</ref><ref>{{harv|Guiraud|1913|p=176}}</ref> 그리고 여행 중에는 영적 지도와 기도로 시간을 즐겁게 보냈다고 한다.<ref>{{harv|Guiraud|1913|pp=130–132}}</ref> 또한, 기로는 도미니코가 도시와 마을을 지나가면 땅바닥에 아무리 날카로운 돌이나 가시 등이 있어도 신발을 벗고 맨발로 느긋하게 길을 걸었다고 증언하였다.<ref name="Guiraud 1913 130"/> 그리고 그의 입술은 슬픔이나 다른 부정적인 말 대신에, 오직 하느님을 찬미하는 소리만이 나왔다.<ref name="Guiraud 1913 130"/>
 
기로의 증언에 따르면, 도미니코는 금욕적인 생활과 노동으로 몸이 버티질 못해서 결국 51세의 나이에 선종했다고 한다.<ref name="Guiraud 1913 172">{{harv|Guiraud|1913|p=172}}</ref> 귀로의 말에 의하면, 그는 고열로 지치고 병든 몸을 이끌고 산 니콜로 성당 부속 도미니코회 수도원에 도착했으며,<ref name="Guiraud 1913 172"/> 도미니코회 수사들이 땅바닥에 쓰러진 그를 들어올려 삼베 위에 눕혔다고 한다.<ref name="Guiraud 1913 172"/> 도미니코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동료 수사들에게 “형제들 간에 서로 사랑하여라. 겸손하여라. 청빈을 자발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영적인 보화를 만들어 가도록 하라.”하고”고 권고하였다.<ref>{{harv|Guiraud|1913|pp=173–175}}</ref> 그는 1221년 8월 6일 정오에 선종하였다.<ref name="Guiraud 1913 175"/> 그가 세상을 떠날 즈음 이미 서유럽의 8관구에 60여 곳의 수도원이 설립되었으며 500여 명의 수사들이 있었다. 1300년경에는 500여 곳의 수도원에 회원들이 1만 여명으로 증가하였다. 도미니코는 1234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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