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마누스 바바리아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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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초 그는 왕국의 동부를 침략한 [[마자르 족]]을 격퇴하여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그들의 근거지를 소탕하였다. [[876년]] [[8월]] [[이탈리아]]를 다스리던 황제 루트비히 2세가 죽자 [[베렌가리오 1세]]를 비롯한 이탈리아 북부의 귀족들은 카를만을 왕으로 받들었다. 그러나 [[교황 요한네스 8세]]는 그에게 황제관 수여를 거부했다.
 
876년부터 878년까지 칼ㅋ라르롤만은칼를롤만은 공공연히 [[이탈리아의 군주|이탈리아의 왕]]위를 주장하며 [[이탈리아]]의 북부와 [[서프랑크]]의 로렌을 침공하였다. 한편 대머리 카를은 [[876년]] [[이탈리아]]의 스폴레토와 카메리노 공작령을 차지한다. 카를만은 카를의 스폴레토, 카메리노에 [[교황 요한네스 8세]]의 관할 권한을 부여해주기도 했다. [[877년]] [[10월]] [[대머리 카를]]이 죽은 뒤 카를로만은 낭트의 람베르트와 구이도 3세를 상대로 스폴레토 등의 권리를 주장했다. 동시에 카를만은 [[바이에른]]의 [[외팅]](Ötting)에서 궁궐과 수도원을 새로이 건립하였으며, [[성모상]] 및 초기 게르만 포교 [[선교사]]들의 유물을 기증하였다. 그는 또 자신의 부왕 [[루트비히 2세 (프랑크)|루트비히 독일인]]이 총애했던 [[언어]]학자 겸 철학자 [[발도]](Baldo)를 초빙하여 수도원장에 임명하였다.
 
=== 생애 후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