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눌푸스 카린티아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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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0년]] 초 아르눌프는 [[대모라바]]에 [[프랑크족]] [[가톨릭]] 선교사 [[니트라]](Nitra)를 파견하였다.
 
[[880년]] 아버지 [[카를로만]]은 [[바이에른]]과 [[이탈리아]]의 통치권을 동생 [[카를 3세]]에게 넘겼다. 이미 성인이었던 아르눌프는 이에 반발했지만 그는 사생아였고, 그의 권리는 묵살되었다. 이후 그는 계속 [[바이에른]]과 [[이탈리아]]의 권리를 주장했지만 [[카를 3세]]와 [[프랑크의 루트비히 3세|루트비히 청년왕]]의 방해로 실패했다. 그는 [[케른텐]]으로 돌아가 계속 장정들을 모아 사병을 양성하였다. [[882년]] 삼촌 [[카를 3세]]는 그를 [[바이에른|바이에른 공작]]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882년]]에 일어난 반란에서 그는 [[판노니아]] [[후작]] 엔겔샬크 2세를2세와 판노니아, 모라비아인 등의 반란을 도왔는데, 이 때문에 삼촌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3세|뚱보왕 카를 3세]]와 반목하게 되었다. [[판노니아]] [[후작]] 엔겔샬크 2세와 그의 동생 아리보는 아르눌프의 측근이 되었고, 아르눌프가 황제 카를 3세를 대상으로 한 [[빌헬마이너 전쟁]]에서 아르눌프를 적극 후원하였다. 아르눌프는 [[885년]] 무렵까지 [[모라바]]의 공작 [[스바토풀크]]와도 갈등관계에 있었다. 스바토풀크는 황제 카를 3세의 사람이었다.
 
작센 출신 또는 콘라디안의 오다와 결혼했다가, 다시 [[프랑스]]의 [[파리 백작]] [[외드]]의 딸 [[파리의 오다]]와 재혼하였다. 이미 그는 첩 빈부르가(Winburge)에게서 [[츠벤티볼트]]와 [[글리스무트]] 등의 자녀가 있었고, 빈부르가 또는 또다른 첩에게서 사생아 [[라톨드]]가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