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마르첼로 2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편집 요약 없음
새 교황은 자신의 본명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마르첼로 2세가 되었다. 다음날 그는 주교로 축성됨과 동시에 교황 대관식을 치루었다. 당시는 사순 시기였기 때문에 의식은 화려하지 않고 최대한 절제하도록 하였다.<ref>Onuphrio Panvinio, who was present, recorded the event: "Anno Dominicae Nativitatis MDLV, postridie quam PP Marcellus creatus est, videlicet die Mercurii IIII Idus Aprilis [10 April 1555], maioris hebdomadae, instantibus magnis solennibus, Coenae Domini, Veneris Sancti, & Paschatis, ne tot solennitates sine Pontifice (qui sacra omnia faceret) transigerentur, quum prius in aurora eius creatio, more Maiorum, per Archidiaconum S.R.E. Franciscum Pisanum Venetum, Diac. Cardinalem S. Marci, in Palatio facta esset, haud multo post ante aram maximam principis Apostolorum suae coronationis & Romani Pontificatus insignia per eundem Archidiaconum suscepit, data benedictione a Ioanne Bellaio Episcopo Cardinale Portuensi & S. Rufinae." (Onuphrio Panvinio, ''Epitome Pontificum Romanorum a S. Petro usque ad Paulum IIII. Gestorum (videlicet) electionisque singulorum & Conclavium compendiaria narratio'' (Venice: Jacob Strada 1557), p. 423.)</ref>
 
== 생애 교황==
마르첼로 2세는 교회 쇄신 열정이 대단하여 교회 활동의 많은 요소를 개혁하고자 했지만, 체질이 허약한 데다가 콘클라베와 이후 주교 서임식 및 교황 대관식을 치르면서 피로가 누적되고 공무에 대한 깊은 불안감, [[성주간]]과 [[부활절]] 행사를 무리하게 집전하고자 했기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었다.<ref>Panvinio, "Life of Marcellus II", 430: Quum satis (ut dixi) firmus non esset viribus, & propterea anno superiori diu etiam febre laborasset, corpore quoque tam comitiorum incommodis, quam obeundis publicis muneribus, quae vetere Christiani populi instituto, annuis Dominici Cruciatus [Good Friday] & Resurrectionis [Easter] diebus per Maximum Pontificem fieri consuerunt, fatigato, duodecimo pontificatus die gravius e pituita, & non levi febre decubuit.</ref> 결국 그는 곧 몸져 누웠다.
[[1501년]] 5월 6일 몬테풀치아노에서 출생한 마르첼로는 시에나에서 인문학을 공부한 후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명령으로 [[로마]]에서 아버지가 시작한 달력 개정 작업을 하였다. 그는 [[추기경]]인 [[교황 바오로 3세|알레산드로 파르네세]]와 친분을 맺어 그의 조카의 가정 교사가 되어 개인 비서가 되어 [[교황청]]의 행정에 게입하게 되었다.
 
== 생애 ==
[[1539년]] 8월 칼라브리아의 니카스트로 [[주교]]에 임명되고 12월에는 추기경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레지오 에밀리아 교구의 관리자가 되어 교회 개혁에 힘썼고 세르비티의 아우구스티누스회를 많이 지원하였다. 1540년에는 교황청 사절 알레산드로를 동행하여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를 접견했다. 카를 5세의 반(反)로마 정책에 반대하여 미움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교황청의 여러 외교 업무에 개입하였고 [[트리엔트 공의회]] 중에는 의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1548년]]에는 바티칸 도서관장과 [[교황 바오로 3세]]의 교회 개혁 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교황 율리오 3세]] 치하에서는 교회 개혁 위원회의 의장이 되었으나 교황의 족벌주의에 반대하여 구비오의 [[주교]]로 밀려났다. [[1555년]] 4월 4일에 시작된 [[콘클라베]]에서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미움을 받아 교황이 될 희망이 없었으나 4일 뒤에는 정세가 바뀌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마르첼로 2세는 안젤로 마사렐리를 공의회의 사무 총장으로 임명하여 전임자 율리오 3세의 개혁안을 신속히 출판하게 하였다. 외교는 중립적인 정책으로 일관하였고 [[예수회]]를 좋아하여 그 수도회 [[신부 (기독교)|신부]] 중의 하나를 자신의 고해 신부로 삼기도 하였다. 마르첼로 2세는 교회 쇄신 열성이 대단하였지만 22일만에 선종하였다. 마르첼로 2세는 [[세례명]]을 교황의 이름으로 사용한 마지막 교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