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호노리오 3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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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노리오 3세의 치세에 많은 제3회가 세워졌다. 그는 1221년 교황 칙서 《생활 지침》(Memoriale propositi)을 내려 [[재속 프란치스코회]]를 인가하였다. 또한 그는 프랑스 [[파리 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던 전임 교수 네 명이 세운 발 데 에콜리에르 연합회를 인가하였다.
 
해박학 지식을 갖고 있었던 호노리오 3세는 성직자들이 특히 신학 분야에서 철저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샤르트르의 사제 위그가 주교로 선출되자 호노리오 3세는 그가 주교가 되기에는 충분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1219년 1월 8일 《quum pateretur in litteratura defectum》이라는 서신을 보내 그의 승인을 보류한다는 뜻을 통보하였다. 심지어 그는 교황청에 근무하는 또다른 주교가 무지하다는 이유를 들어 주교직을 박탈하였다. 호노리오 3세는 그 당시 학문의 위대한 두 축이었던 파리 대학교와 [[볼로냐 대학교]]에 각종 특혜를 내렸다. 이들 대학교 외에도 그는 교구에서 신학 공부를 용이하도록 하기 위해 교황 칙서 《Super specula Domini》를 발표해 재능 있는 젊은이들을 선발해 신학교에 입학시키고 나중에 자신들의 교구에서 신학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호노리오 3세는 작가로서도 명성이 높았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로마 교회의 징벌서》(Liber Censuum Romanae Ecclesiae)가 있는데, 이 책은 재산과 관련한 중세 교회의 입장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사료이자 《[[교황 연대표]]》의 연속이기도 하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