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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가야사를 통해 가야의 가장 유력한 적이었다.
*건국시기에 탈해세력이 [[수로왕]]과 가락국을 놓고 경쟁하다 패하여 신라로 도망한 이래 [[탈해 이사금]]이 신라왕에 즉위하자 신라는 서기 [[79]]년경에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을 합병해 낙동강 및 동부경남으로 진출을 개시함으로써 그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가야와 충돌을 빛기 시작한 것이다.
*[[77년]] 가을 8월에 가야는 [[탈해 이사금]]의 신라와 교전하였는데 [[신라]]의 [[아찬]] [[길문]](吉門)에 의해 [[황산진]](黃山津)<ref>지금의 경남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 황산역터 근처. 전덕재, 삼국시대 황산진과 가야진에 대한 고찰, 한국고대사연구 제47권, 2007년 9월, 35~75면 참고</ref> 어구에서 1천명의 가야군 전사자가 발생하였다.<ref>《[[삼국사기]]》<[[: s: 삼국사기/신라본기/제1권/탈해 이사금|신라본기 제1권 탈해 이사금 條]]></ref>
*[[97년]] 1월에 [[신라]]의 [[파사 이사금]]은 가야를 치려 하였으나 가야의 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므로, [[파사 이사금]]은 이를 용서하였다.<ref>《[[삼국사기]]》<[[:s:삼국사기/신라본기/제1권/파사 이사금|신라본기 제1권 파사 이사금 條]]></ref>
*이후 한동안 가야와 신라의 전쟁은 소강상태를 유지했는데 [[102년]] 음력 8월, 파사왕이 진한제국의 맹주자격으로 [[음즙벌국]]과 [[실직곡국]] 사이의 영토 분쟁을 해결해줄 것을 요청받자, [[수로왕]](首露王)에게 이를 의뢰했고. 수로왕은 분쟁지역을 음즙벌국에 귀속되게 하였다. 그러나 그 후의 이를 축하하는 잔치에서 벌어진 사소한 사건이 살인사건으로 비화되자 이를 기화로 분쟁당사국을 침공해 합병한 파사왕은 [[106년]]에 가야를 침공해 파사왕 다음인 [[지마 이사금]]때인 [[115년]]~[[116년]]까지 전쟁이 벌어져 결국 신라의 패퇴로 끝났다.
*이후 [[포상팔국]] 전쟁에서 신라에 왕자를 볼모로 보낼만큼 빚을 진 가야는 신라와 직접 전쟁을 피하는 대신에 일본의 소국들을 매수하여 신라를 공격하게 했다. 일본의 소국들은 철 생산능력이 없어 가락국을 '쇠나라(須那羅)'라고 부를만큼 자국의 철 수요를 전적으로 가락국에 의존했고 가락국 및 가야는 철의 공급력을 이용해 일본의 소국들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이를 이용해 신라를 공격한 것이다. 신라는 모든 것이 가야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후 일본소국들의 공격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233년]] [[왜구]]가 신라의 서라벌을 포위했다가 천명이 전사한 것을 시작으로 [[유례 이사금]]대인 [[286년]]~[[295]]년에 수차의 일본군의 침공이 있었다. 신라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의 중심지인 [[오사카|나니와]](難波)근방의 [[아카시 시|아카시노우라]](明石浦)를 공격하기까지 했고 이로인해 한동안 왜구의 침입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ref>[[안정복]]의 [[동사강목]]-제 2상 을묘년, 신라 유례왕 12년. [[김세렴]]의 [[해사록]]- 왜황 응신(22년)때 신라측이 명석포에 들이닥쳤다. 일본이 강화와 군대해산을 요청함. 응신 22년은 유례왕 8년이었다." 일본[[연대기]]. 이창일본전. 기타</ref>
*[[흘해 이사금]]대인 [[346년]]에 또다시 일본의 침공이 있었고 [[내물왕]]대인 [[364년]]과 [[393]]년에 두차례의 일본의 공격이 있었는데 이 두차례는 특히 가야의 신라침공을 위한 전초전이었다. 당시에 신라는 고구려와 제휴하고 있었고 이에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고 있던 백제가 신라에게 반감을 품고 유력한 동맹국이었던 가야를 부추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무렵 가야의 전체 인구는 30만 정도였고 동원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락국을 포함해 가야소국 전체의 정규군 수는 2만명 안팎이었다. 여기에 가야는 일본의 소국들에서 수입한 [[용병]]단 3만명을 더해 신라를 치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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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업 ==
;가락국과 그외의 가야소국들은 고대의 [[페니키아]]나 [[고대 아테네|아테네]], 그리고 현대의 [[싱가포르]]와 같은 전형적인 상업도시국가였다.
*가락국을 허브로 동북아연안 바다에서 해상무역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가령 중국에서는 [[신나라]](新--)시대에 아주 잠깐 사용되었던 화천(貨泉)이라는 동전이 한반도에서 일본에까지 다수 출토되기도 하였다.
*가락국의 주요산업이 해상무역이었음은 가락국의 초기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탈해세력을 해군으로 쫓아내었다는 기록은 가락국의 해상력의 막강함을 시사하는 것이다. 또한 수로왕비인 [[허황옥]]의 세력이 도래할 때 가져온 문물을 한사잡물(漢肆雜物)-한나라의 온갓물건이라 하여 중시 한 점에서 구야국은 건국초기부터 강력한 해상권을 기반으로 해외무역을 발전시켰음을 알 수 있다. 주요 무역상품은 철(鐵)이었다. 봉황대에서는 송풍구과 슬래그등의 제철소 유적이 확인되었다. 가락국은 "여뀌잎" 같다는 표현대로 땅이 좁아 농업기반은 취약한 대신에 철이 많이 산출되어 조선전기까지 상당한 철을 국가에 공납했을 정도였다.
*가락국의 농업기반이라면 [[김해평야]]를 생각하겠지만 당시에 김해평야는 [[고 김해만]]이라는 바다여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대신에 천혜의 무역항구를 가락국에 제공했다. 농업에서 뭔가 경제적인 이득을 기대할 수 없는 가락국으로서는 싫든 좋든 공업을 발전시켜 외국과 교역을 해야만 했고 그 교역의 길이 막힌 순간에 쇠망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아주 농업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던지 회현동 패총 인근 마을 유적에서 탄화미와 벼가 출토되었다.
*1차 산업은 어업이 주가 되었다. 회현리 등, 많은 수의 [[조개무지]](貝塚)가 발견되었다. 조개무지 안에서는 많은 량의 조개껍질과 함께 다양한 종류의 생선뼈가 확인되었고 그 중에서는 심지어 고래, [[참치]], [[상어]]도 발견되었다. 가락국은 농업으로는 수요를 채울 수 없는 식량을 외국과의 교역과 함께 어업에 의존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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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 바깥외부 고리링크 ==
* [http://www.garakkim.net/ 김해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