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영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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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 하노버'''({{lang|en|Alexandrina Victoria Hanover}})이고, 정식 칭호는 ‘HRH Alexandrina Victoria Hanover von Witten and Saxe-Coburg and Goetha, Dei Gratia Queen of All Britons, Defender Of The Faith, and Empress of India’이다.
그녀의 재위 기간은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로 통칭되며 ‘[[태양|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대영 제국]]의 최전성기와 일치한다. 그리고 많은 유럽의 왕가와 연결되어 있어 '유럽의 할머니'라고도 불린다. 큰아버지인 [[윌리엄 4세]]가 서거하자 그의 뒤를 이어서 [[1837년]]에 빅토리아는 즉위하였고, [[하노버 가|하노버 왕가]]가 여성의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즉위와 동시에 [[조지 1세]] 때부터 계속된 영국과 하노버의 동군 연합 관계는 끝나게 되고, 그는 영국 왕위만을 계승하여 이후 64년 동안 재위하였다. [[1877년]] [[1월 1일]]부터 [[1901년]] [[1월 22일]]까지는 영국 군주로서 최초로 [[영국령 인도 제국|인도 제국]]의 [[황제]]로서도 군림하였다.
한편, 그녀는 [[혈우병]] 보인자였고, 이 유전자가 유럽의 왕가로 퍼져 러시아 왕가의 몰락을 부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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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위 이전 ===
[[파일:Princess Victoria aged Four.jpeg|thumb|left|4살 때의240px|어린시절의 빅토리아]]
빅토리아는 [[1819년]] 5월 24일 런던의 [[켄징턴궁|켄징턴 궁전]]에서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와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녀 빅토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이듬해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연인 관계였던 [[아일랜드]] 출신의 존 코로이 밑에서 자라게 되었다. 당시 아버지의 빈 자리를 외숙부이자 종형부(從兄夫)인 [[레오폴드 1세|레오폴드]]가 채워주고 있었다. 빅토리아와 레오폴드의 관계는 레오폴드가 [[1831년]]에 [[벨기에]]의 [[왕]]으로 선출되어 떠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사실 빅토리아는 원래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할아버지 [[조지 3세]]의 직계 혈통이 끊어지면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조지 3세는 15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조지 4세]]의 유일한 적통 [[샬럿 오거스타]] 공주가 1818년에 죽자, 그의 직계손 중에는 왕위를 계승할 사람이 없게 되었고, 그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던 빅토리아가 [[추정 상속인]]이 되었고, 사실상 [[윌리엄 4세]]의 사후 그의 즉위가 확실시 되었다. 왕실은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녀 빅토리아|켄트 공작 부인]]의 연금을 두 배로 높이고 빅토리아의 양육비로 3만 파운드를 지급했다.<ref name="바이하이진">바이하이진, 《여왕의 시대》, 김문주 역, 미래의 창, p.437~p.438</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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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는 앨버트와의 사이에 4남 5녀를 두었으며 대부분의 자녀들이 [[유럽]]의 주요 왕족과 결혼하여 말년에는 '유럽의 할머니(the grandmother of Europe)'로 불렸다.
==== 양당제의 확립 ====
==== 친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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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거 ====
빅토리아 여왕은 [[2차 보어 전쟁]] 이 한창 진행되던 도중 [[1901년]] [[1월 22일]] 82살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그는 [[하노버 왕조]]의 마지막 군주였으며 그가 죽고 나서 현재 [[윈저 왕조]]의 전신인 삭스-코버그-고타 왕조(작센-코부르크-고타의 영어식 발음)가 시작되었다. 빅토리아 여왕과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앨버트|앨버트 공작]]의 장남인 에드워드([[에드워드 7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 외교 ==
=== 제국주의의 가속화 ===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가 가속화 되면서 영토확장에 전력을 쏟았다. 이로 인해 영국은 여러 대륙에 걸쳐 [[식민지]]를 확보하고 식민제국을 수립하여 ''''해가 지지 않는 나라'''<nowiki/>' 라는 별명을 얻었다. 빅토리아의 통치 기간동안 영국의 영토는 세계 전 대륙의 4분의 1을 확보하였고 4억명의 인구를 보유한 대제국이 되었다.
=== 대유럽 정책 ===
==== 크림전쟁 ====
=== 대아프리카 정책 ===
==== 3C 정책 ====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19세기 후반부터 [[3C 정책]]을 추진하여 이집트의 [[카이로]]('''C'''airo),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C'''apetown), 인도의 [[콜카타|캘커타]]('''C'''alcutta)를 거점으로 하는 식민정책을 취하였다. 세 도시의 머리글자가 모두 C로 시작하여 3C 정책(3C Policy)라고 한다. 이집트에서의 지배권을 강화한 영국은 카이로에서 케이프타운 까지 아프리카를 종단하여 지역지배를 강화하려 하였으나 서아프리카를 영토화하여 식민지배를 강화하던 [[프랑스]]의 [[아프리카 횡단 정책|횡단정책]]과 충돌하여 [[1898년]] [[파쇼다 사건]]이 발생하였다.
또한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시아로 남진을 꾀하는 러시아의 [[남하정책|남진정책]]과도 충돌하여 협상이 이루어졌고 독일의 대외정책인 [[3B 정책]]과도 충돌하였으나 협상이 결렬되었다. 이런 지속적인 영토확장 갈등의 결과 [[제1차 세계 대전|제1차 세계대전]]이 야기되었다.
==== 보어전쟁 ====
=== 대아시아 정책 ===
==== 아프가니스탄 전쟁 ====
==== 아편전쟁 ====
영국은 [[청나라]]와의 교역에서 무역적자가 이루어지자 밀무역을 통하여 [[동인도 회사|동인도회사]]에서 다량의 [[아편]]을 지속적으로 중국에 유입시켰다. 청나라는 [[1729년]] 아편금지령을 실시했으나 이후 100여년간 아편은 지속적으로 대량으로 유입되어 백성들의 아편중독이 사회문제가 되었다. 또한 중국의 [[지정은제]]를 도입하여 은을 화폐로 사용하던 중국에서 은이 다량으로 영국에 유출되었다. [[도광제]]가 [[임칙서]]를 [[광저우 시|광저우]]에 특사로 파견하여 아편을 몰수하고 불태우자 영국에서는 청나라와의 개전론이 들끌었다. [[1840년]] 6월, 여당인 [[휘그당 (영국)|휘그당]]의 [[파머스턴|파머스턴 내각]]은 앨리어트를 특사로 하여 군함과 병력을 이끌고 청나라를 침략하여 [[아편 전쟁|아편전쟁]]이 시작되었다. 1842년 [[난징 조약|난징조약]]을 체결하여 중국의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 전쟁의 결과 중국의 반식민지화가 가속되고 [[홍콩]]이 영국에 할양되었다.
==== 중국의 반식민지화 ====
아편전쟁을 이끈 파머스턴이 수상이 되면서 빅토리아 시대의 대아시아 정책에 있어서 중국과 인도는 영국의 영토확장정책에 가장 중요한 거점국가가 되었다. 크림전쟁으로 동맹관계에 있던 프랑스와 연합하여 [[1856년]] [[제2차 아편 전쟁|제 2차 아편전쟁]]을 개시하였다. 청나라와 영국, 프랑스간의 [[톈진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조약 불이행을 이유로 영프 연합군은 [[1860년]] 8월 북경을 점령하였다. 이로 인해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어 중국은 막대한 전쟁배상금과 [[태평천국의 난]]을 비롯한 내우외환에 시달렸으며 영국은 청과의 조약 체결이행과 이권 확보를 위해 청나라 정부를 지지하여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였으며 은 200만냥을 획득하였다. 동시에 통치권을 상실한 청나라 남부 연안의 전역을 방위하는 목적으로 군대를 파견하여 통치하였다.
==== 인도제국의 수립 ====
==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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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
강하고 소박하며, 정직한 성격으로 내각의 보고서를 한 자, 한 구절까지 면밀히 검토하는 성실한 왕이었다. [[차티즘|선거법 개정]], 아프가니스탄 전쟁, [[아편 전쟁|중국과의 전쟁]], 아일랜드 문제, 초등 교육법, [[크림 전쟁]], [[보어 전쟁|남아프리카 전쟁]] 등 국내외의 중대한 문제들을 교묘하고 과단성 있게 해결하여 제국의 번영을 실현시켜 국민의 존경을 받았다. 19세기 대영 제국이 번영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왕으로, 그가 정치를 하는 동안 영국은 사상 최고의 번영을 누렸다.<ref>{{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2}}</ref>
=== 가정 ===
빅토리아는 [[입헌군주제|입헌 군주]]로서 ‘군림하되 통치하지
=== 영향 ===
그는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은 군주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그의 이름은 [[런던]]에 있는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 [[짐바브웨]]와 [[잠비아]] 사이의 [[빅토리아 폭포]]를 비롯한 영국과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의 지명과
흔히 '빅토리아 여왕'이라고 하면 좁은 뜻으로는 당연히 여왕 자신을 의미하지만, 넓은 뜻으로는 빅토리아 시대의 레이디, 빅토리아 스타일의 레이디를 통틀어 의미하기도 한다.
== 직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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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남 : 독일 황제 [[빌헬름 2세]]
* 3녀 : 그리스 왕비 [[조피 폰 프로이센 왕녀|소피아]] ([[콘스탄티노스 1세]]의 왕비)
* 외손자 :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2세]], [[알렉산드로스 (그리스)|알렉산드로스]], [[파블로스]]
* 외손녀 : 루마니아 왕비 [[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 엘레니|엘레니]] (카롤 2세의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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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155 ⟶ 185:
|1910년 5월 6일
|
* '''배우자 :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크리스티안 9세]]의 딸)
* 슬하 3남 3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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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하 2남 5녀
*
* 사위 : [[바텐베르크 공자 루이스]]
* 4녀 : 러시아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1872년)|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 사위 :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
|2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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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7월 31일
|
* '''배우자 : 러시아의 [[러시아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알렉산드르 2세]]의 딸)
* 슬하 2남 4녀
* 장녀 : 루마니아 왕비 [[에든버러의 마리아|마리아]]
줄 227 ⟶ 257:
* 장녀 : [[코넛 공녀 마거릿]]
* 사위 :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6세 아돌프|구스타프 6세]]
* 외손자 : [[:en:Prince Gustaf Adolf, Duke of Västerbotten|구스타프 아돌프]] (현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의 아버지)
* 외손녀 : 덴마크의 왕비 [[스웨덴의 잉리드|잉리드]] (현 덴마크 여왕 [[마르그레테 2세]]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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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남
줄 239 ⟶ 268:
|1884년 3월 28일
|
* '''배우자 : [[:en:Princess Helena of Waldeck and Pyrmont|올버니 공작부인 헬레나]]'''
* 슬하 1남 1녀
* 장남 : [[카를 에두아르트 폰 작센부르크고타 공작|찰스 에드워드]] (현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의 외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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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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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녀 : 스페인 왕비 [[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에우헤니아|빅토리아 에우헤니아]]
* 사위 :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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