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보 습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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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보천보사건 동아일보 호외 1.jpg|thumb|right|250px|1937년 6월 5일자 동아일보 호외]]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6사는 백두산지구 유격구를 건설하고, 박달·박금철 등이 이끄는 갑산군 내 ‘조국광복회’소속 조직원들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 혜산진에서 20㎞ 떨어진 보천보에 습격하여 경찰주재소·면사무소·우체국 등의 관공서와 산림보호구 등을 공격하고 격문을 살포하였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706090020920200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7-06-09&officeId=00020&pageNo=2&printNo=5667&publishType=00020 재습의 공포에 떠는 주민 남부여대 피란] 동아일보 1937년 6월 9일</ref><ref name="maei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70606y00_02.pdf 함남국경에 제2동흥사건咸南國境에 第二東興事件)] 매일신보 1937.06.06, 02면<br>
[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70606v00_03.pdf 襲來한 崔賢一味를 警務當局絶滅企圖 事態를 重視하고 第一線督勵 普天堡事件續報] 매일신보 1937.06.06, 03면<br>
[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70607y00_02.pdf 普天堡賊禍犧牲者 七名은 署葬을 擧行] 매일신보 1937.06.07, 02면<br>
[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70608y00_02.pdf 惠山鎭『今村』部隊와 만주국군이 연합 추격(滿洲國軍이 聯合追擊) : 보천보 사건 속보(普天堡事件續報)] 매일신보 1937.06.08, 02면</ref>
 
1937년 6월 7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6월 4일 보천보 습격 당시 민간인 2명(성인, 일본 순사부장의 딸 2세 여아)이 사망했으며, 6월 5일 파견된 30명의 경찰추격대와 충돌하여 동북항일연군의 25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 일본 경찰추격대 30명 중 7명 사망, 14명의 부상자가 났으며, 전소한 총피해액은 50.000원이라고 밝혔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7060700209202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7-06-07&officeId=00020&pageNo=2&printNo=5665&publishType=00020 보천보습격사건피해판명] 동아일보 1937년 6월 7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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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보 사건은 규모가 좀 컸다는 것 외에는 1920~30년대에 만주 무장단체들이 조선국경을 침입하여 벌인 무수히 많았던 약탈 사건들<ref>[http://theme.archives.go.kr/next/government/viewGovernmentArchivesEvent.do?id=0001563980&docid=0027126862 1920년~1936년간 국경 3도 비적 누년 상황표 (國境三道 匪賊 累年 狀況表)] (대정9년 -소화11년) 조선총독부 경무국 경무과 ([http://theme.archives.go.kr/next/common/archWebViewer.do?singleData=Y&archiveEventId=0027126862 원문 바로보기])<br/>[http://theme.archives.go.kr/next/government/viewGovernmentArchivesEvent.do?id=0001563997&docid=0027126469 국경지방에서의 치안 상황 : 제73회 제국의회(帝國議會) 설명자료] 昭和12年(1937년) 조선총독부 경찰청 경무국 : [http://theme.archives.go.kr/next/common/archWebViewer.do?singleData=Y&archiveEventId=0027126469#6 (원문 바로 보기)] - p.6 : 1932년~1937년 9월 기간 대안비적 선내침입누년표(對岸匪賊 鮮內侵入 累年表) / p.7 : 압록강·두만강 대안 마비적(馬匪賊) 출몰 누년표 (1932~1937.9)</ref> 중의 하나일 뿐이므로 곧 잊혀졌고, 해방당시 이 사건을 거론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대로 이 사건을 신문이 크게 보도하여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면, 그 유명한 6사장 김일성이 전사했다는 것도 대다수 신문이 보도했으므로<ref name="news"/> 그가 전사했다는 것도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어야 한다. 그러나 해방 당시 사람들은 보천보 사건도, 김일성이 전사했다는 것도 거의 알지 못했다.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어려운 이 사건이 유명해진 것은 북한 김일성이 권력을 잡고 난 후 자신의 항일투쟁 업적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한 후부터이다.
 
1935년 2월에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7HIL_A1910_1_0026163 이홍광(李紅光, 1910~1935)]이 일으킨 [[동흥습격사건|동흥(東興) 습격 사건]]은<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5021400209202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5-02-14&officeId=00020&pageNo=2&printNo=5100&publishType=00020 平北(평북)에 人民革命軍侵入(인민혁명군침입) 民家(민가)에 衝火(충화)코 掠奪(약탈)] 동아일보 1935.02.14<br/>[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502150020910201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5-02-15&officeId=00020&pageNo=2&printNo=5101&publishType=00010 被襲東興邑(피습동흥읍) 民家(민가) 六十戶(육십호)에서 掠奪(약탈)] 1935.02.15 동아일보 2면<br/>[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5021600209102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5-02-16&officeId=00020&pageNo=2&printNo=5102&publishType=00010 被襲(피습)된 東興邑(동흥읍)의 被害(피해) 死傷十三(사상십삼), 拉去十名(납거십명)] 동아일보 1935.02.16<br/>[http://db.history.go.kr/id/npjj_1935_02_16_x0002_0820 즉사 중경상 납거 등, 피해자 23명, 사자 8, 중경상 5, 납거 10명, 동흥 습격사건 後報/ 주민측 피해/ 공산군을 계속 추적 중] 조선중앙일보 1935년 02월 16일 2면</ref><ref>[http://www.i815.or.kr/data2/ganhaeung/thesis/1994/199413.pdf 장세윤, 「이홍광연구(李紅光硏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 8, (독립기념관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pp.337~369</ref> 보천보 사건보다 더 큰 충격을 주었고, 매일신보와 동아일보는 보천보 사건을 제2 동흥사건(第二東興事件)이라고 보도할 정도였지만<ref>[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70606y00_02.pdf 咸南國境에 第二東興事件 / 惠山鎭 管內 普天堡에 共産匪 百餘名 來襲] 매일신보(每日申報) 1937년 06월 06일 02면 01단<name="maeil"/ref><ref name="choi"/>, 오늘날 동흥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전문연구자 외에는 거의 없다. 이를 보아도 보천보 사건이 실제로는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가질만한지 알 수 있고, 김일성의 중요한 항일투쟁 업적이라는 북한의 대대적 선전 때문에 터무니없이 부풀려져 알려진 것이다. 더구나 이 사건 때문에 연루된 [[조국광복회]]의 구성원들 수백명까지 검거되어 처벌받는 소위 [[혜산사건]](惠山事件)으로 지하 조직이 궤멸되었다.<ref name="wa"/><ref name="suh"/><ref name="ki"/>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