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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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기 (토론 |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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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과 ==
=== 긴박하게 돌아가는 시안 ===
12월 7일 장제스는 공산군 토벌을 독려하기 위해 전용기편으로 직접 시안에 도착하였다. 동북군 지휘관들은 다시한번 장총통에게 항일전을 촉구하였으나 거절당했고 양호성(楊虎城) 장군 휘하의 4만명의4만 명의 서북군도 더 이상 홍군과의 소모전은 불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동북군과 행동을 같이 하였다. 12월 9일에는 수천명의 학생들이 반일시위를 벌였는데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장제스의 헌병대가 발포, 두명의 동북군 지휘관의 자식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장쉐량이 중간에서 성난 학생군중을 무마하여 더 이상 큰 사건으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장제스는 제6차 홍군토벌전을 감해하려는 계획을 발표하고 총동원령이 임박하였음을 알렸다. 장제스는 장쉐량을 경질하고 토벌군사령관을 교체하할 계획을 세웠고 장제스의 친위병력인 [[남의사]](藍衣社)는 항일을 주장하는 동북군 장교에 대한 블랙리스트까지 작성 동북군의 핵심세력을 제거하고 공산군 토벌에 찬성하는 장군들로 대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2월 11일]] 밤 10시 장쉐량은 동북군, 서북군의 합동사단장회의를 소집하고 본격적인 반란에 돌입하엿다. 동북군 1개사단과 서북군 1개연대를 시안 외곽을 이동하라는 비밀명령이 떨어지고 총통과 그 참모진을 '체포'하기로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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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구국회의를 즉각 소집할 것.
 
요구조건에요구 조건에 대하여 중국 공산당과 중화소비에트 정부, 홍군은 즉각 찬성을 표시하고 공산당 대표들이 시안으로 날아왔고 공동항일투쟁 의사를 발표하였다. 12월 14일 에는14일에는 동북군 약 13만명13만 명, 서북군 4만명4만 명, 홍군 9만명으로9만 명으로 구성된 "항일연합군"이 구성되고 장쉐량이 연합군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홍군과의 전투명령은 즉각 중지되었고 항일연합군은 새로운 전열을 가다듬고 일본과 전쟁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변화는 국민당의 사전검열로 서북지역을 제외한 지역에서는일체 보도되지 않았고 장쉐량은 그저 반란군으로 묘사될 뿐이었다. 난징의 국민당 정부는 총통의 체포와 구금사실을 철저하게 숨기고 서북지역의 반란군을 응징할 준비를 하였고 이는 난징정부의 내부권력 투쟁양상으로 번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