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중 (춘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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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청년기 ===
관중은 [[기원전 725년]] 제나라 영상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상은 영수 근처에 위치한 상업의 중심지로, 수운을 통해 교류하기 쉬운 곳이다. 경제를 중요시 했던 관중의 사상은 자신의 출생지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젊은 시절 [[포숙]]과 함께 지냈으며, 널리 알려져 있는 “관포지교”의 기록 외에는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출신지인 영상의 특성과 관포지교의 내용 중 상업과 관련된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때 상업에 종사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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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료시절 ===
관중이 제환공에게 중용되어 재상이 되었을 때는 [[기원전 686년]]. 중원을 차지하고 있던 주왕실의 통제력을 갈수록 약해지고 [[제]](齊), [[초]](楚), [[진]](晉), [[진]](秦), [[연]](燕), [[노]](魯) 등을 비롯한 [[제국]](諸國)들이 차츰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국의 실리를 취하며 군웅할거하던 시절이다.
 
관중이 재상이 된 후 [[기원전 681년]] 노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겨 화의를 하던 과정에서 노나라의 장수 [[조말]]이 단도로 제환공을 위협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조말은 제나라에서 가져갈 노나라 영토를 돌려달라고 했고, 위협에 못이긴 제환공은 그러겠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영토를 돌려주지 않고 그를 죽이려 했다. 관중은 제환공을 말리며 군주가 한번 뱉은 말을 지키지 않으면 어떤 제후도 이후에 제나라를 믿고 따르지 못할 것이라며 “신의”에 대해 설명했다. 결국 노나라의 영토는 다시 돌려줬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제환공의 명성은 중원에 퍼졌다.
 
제환공 재위 7년([[기원전 679년]])에 [[위]](衛)의 견(甄)에서 회맹을 열고 패자의 지위에 오른다.
 
=== 사망 ===
제환공 재위 41년 ([[기원전 645년]])에 관중이 병이 나자 환공이 물었다.
 
* "뭇 신하들 가운데 재상을 시킬 만한 이는 누구인가?" 관중이 말했다."임금보다 더 신하를 잘 알 사람은 없지요." 환공이 물었다. "역아(易牙)는 어떤가?" "제 자식을 죽여 임금에 영합했으니 인정에 어긋납니다. 안 됩니다." 환공이 다시 물었다. "개방(開方)은 어떤가?" "부모를 배반하고 임금에게 영합했으니 인정에 어긋납니다. 가까이 두기 어렵습니다." 환공이 다시 물었다. "수도(豎刀)는 어떤가?" "제 생식기를 갈라 임금에게 영합했으니 인정에 어긋납니다. 친애하기 어렵습니다." 관중이 죽고 나자 환공은 관중의 말을 따르지 않고 이 세 사람을 가까이 두어 중용했고, 이리하여 이들 세 사람이 정권을 전횡하게 되었다.'''<ref>네이비 지식백과사전 사기 제태공세가 권32</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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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 ==
 
관중의 사상은 [[사기]](史記) 관안열전과 그의 저서로 알려진 [[관자]]를 통해 알 수 있다. 관중이 직접 작성한 부분과 후학들이 그가 했던 말을 집대성한 책으로, 엄연히 말하자면 온전히 그가 작성한 책이라고는 볼 수 없다.
 
==== 유물론적 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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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은 유물론적 개념을 바탕으로 이데올로기 정치체제를 구축한다. 이른바 목민이다. 백성을 기른다는 개념을 처음 도입한 인물이 바로 관중이다. [[정약용]]의 [[목민심서]]에서의 목민도 관중의 사상에서 유래한 것이다.
 
목민의 주요내용은 "사유(四維)"로 설명할 수 있다. [[사유]]는 '''예(禮),의(義),염(廉),치(恥)'''로 각각 예절, 의로움, 곧음, 수치심을 의미한다. 관중은 사유가 물질적으로 풍족해졌을 때 지켜진다고 보았다. 하지만 경제적/물질적만으로 백성을 다스리려 하면, 예기치 못한 상황(흉년,전쟁 등)이 발생하였을 때 그들을 제어할 수 있는 명분이 사라진다. 그래서 관중은 목민의 안전장치로써 "제사"를 권장했다.
 
고대의 사후세상은 현재와는 다르게 현실세계를 그대로 옮겨놓은 곳이다. 살아서 농민계층이었다면 죽어서도 농민계층이고, 살아서 귀족계층이었다면 죽어서도 귀족계층인 것이다. 관중은 이러한 "제사","조상신"의 개념을 활용하여, 만약 후손들이 자신의 신분/직업을 지키지 않는다면 조상신들은 사후세계에서 고생을 하게되고 이는 고스란히 후손들에게 화로 돌아오게 된다는 인식을 심어주게 되는 것이다.
 
현재의 시각에서는 폐쇄적이고 일면 잔인한 사상이지만, 당시 귀족계층을 제외한 백성의 대우는 매우 낮았던 시절이다. 오히려 관중의 목민으로 인해 비록 그것이 정치체제의 안정화를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백성의 힘을 인정하고 그들의 처우를 개선하려 했다는 점을 높이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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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향 ==
* 사후에도 그의 정치철학은 계속 제나라의 통치이념으로 활용되었고, 이는 제나라가 전국시대까지 전통적인 강국의 위치에 있을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 훗날 등장하는 도가는 물론 제자백가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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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화 ==
 
{{인용문|내가 예전에 곤궁할 때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익을 나눌 때 내가 더 많이 차지하곤 했다. 그럼에도 포숙이 나를 탐욕스럽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가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내가 포숙을 대신해서 어떤 일을 벌이다가 (실패해 그를) 더욱 곤궁하게 했건만, 포숙이 나를 어리석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시운이 좋을 때와 나쁠 때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 내가 일찍이 세 번이나 벼슬길에 나섰다가 세 번 모두 군주에게 내쫓기고 말았으나, 포숙이 나를 못났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세 번 싸움에 나가 세 번 모두 도망쳤을 때에도 포숙이 나를 겁쟁이라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나에게 노모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자 규가 (왕위를 놓고 다투다가) 패하자, 소홀(召忽)은 죽고 나는 붙잡혀 굴욕을 당했을 때에도 포숙이 나를 수치도 모르는 자라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사소한 일에는 수치를 느끼지 않으나 천하에 공명을 날리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주는 것은 포숙이다.<ref>네이비 지식백과사전 사기 열전 권62 관안열전</ref>}}
 
이것이 고사성어 “관포지교”의 유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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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바깥외부 고리링크 ==
* [http://terms.naver.com/list.nhn?cid=4721&categoryId=4721 네이비 지식백과사전 사기 완역]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70128&cid=432&categoryId=4148 네이버 지식백과 고사성어 관포지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