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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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는 [[들린부르크]]의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1848년]] [[독일]]의 통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요한]]을 비롯한 범독일주의자, 대독일주의자들은 그에게 독일의 모든 부족의 첫 실질적 통치자의 이미지를 부여하려 했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자신의 오페라 로헨그린(1850년작)에서 하인리히 1세를 캐릭터로 등장시켜 대중의 주목을 받으려 했다.
후에 [[아돌프 히틀러]] 및 [[나치당]]은 [[독일 민족]], 독일 국가, 단독 게르만 국가의 기원을 찾으려 하였고, 그 게르만 국가의 기원을 하인리히 1세와 그의 아들 오토 1세에게서 찾으려 하였다.
 
후에 [[아돌프 히틀러]] 및 [[나치당]]은 [[독일 민족]], 독일 국가, 단독 게르만 국가의 기원을 찾으려 하였고, 그 게르만 국가의 기원을 하인리히 1세와 그의 아들 오토 1세에게서 찾으려 하였다.
 
나치 당원이었던 [[하인리히 히믈러]]는 자신이 하인리히 1세의 환생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ref>Frischauer, Willi. Himmler, the Evil Genius of the Third Reich. London: Odhams, 1953, pages 85-88; Kersten, Felix. The Kersten Memoirs: 1940-1945. New York: Macmillan, 1957, page 238.</ref>
 
== 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