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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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아돌프 히틀러]] 및 [[나치당]]은 [[독일 민족]], 독일 국가, 단독 게르만 국가의 기원을 찾으려 하였고, 그 게르만 국가의 기원을 하인리히 1세와 그의 아들 오토 1세에게서 찾으려 하였다.
 
나치 당원이었던 [[하인리히 히믈러]]는 자신이 하인리히 1세의 환생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ref>Frischauer, Willi. Himmler, the Evil Genius of the Third Reich. London: Odhams, 1953, pages 85-88; Kersten, Felix. The Kersten Memoirs: 1940-1945. New York: Macmillan, 1957, page 238.</ref> [[하인리히 히믈러]]는 매년 7월 2일 그의 사망일을 기념하여 추도행사를 하기 위해 퀘들린부르크를 여러 번 방문했다. 히믈러는 그를 최초의 "게르만인의 왕"으로 규정하고, 하인리히의 무덤을 독일 국민들을 위한 순례지로 선언했다. [[1937년]]에 그의 관은 개봉되어 새로운 석관에 안치되었다.
 
== 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