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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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나쁜 공작 또는 악마 공작이라는 별명의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 (바이에른 공작)|아르눌프]]와는 [[921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전쟁을 하였다. 하인리히는 자신의 영지 중 [[라티스본]]을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 (바이에른 공작)|아르눌프]]에게 양도하는 대신 자신을 왕으로 인정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는 이를 거절했다.
 
[[919년]] 일부 귀족들은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 (바이에른 공작)|아르눌프]]를 왕으로 선출하였다. 이후 두 차례의 전쟁 끝에 921년 바이에른을 격파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 (바이에른 공작)|아르눌프]]는 자치권과 자신의 얼굴을 새긴 [[동전]]을 독자적으로 발행할 권리를 추가로 요구했고, 하인리히 1세는 이를 승인함으로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슈바벤]]의 [[부크하르트 2세]]도 하인리히 1세에게 일단 충성을 맹세했지만 계속 반발하였고, 하인리히 1세는 계속 다른 귀족을 슈바벤 공작으로 임명하려고 암암리에 시도하였다. [[부크하르트 2세]]가 죽자 하인리히는 다른 귀족을 [[슈바벤]] 공작에 임명한다. 그밖에도 [[프랑크 족]] 역시 그를 국왕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귀족들과의 불화는 그의 즉위의 정당성 및 왕국의 안정에 위협적이었고, [[마자르 족]]의 잇단 침략에도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920년대 내내 하인리히는 마자르 족의 거듭된 침략에 시달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