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치히 논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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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석 분위기 ==
 
작센의 게오르게 공작은 공개적 논쟁으로 신학적 토론을 명료화하고 비텐베르크 대학의 대중적인 모습을 훌륭하게 만들어 줄것으로 기대하였다.<ref>헤르만 셀더하위스, 《루터: 루터를 말하다》 (세움북스, 2016), 199 </ref>
뛰어난 신학자이며 로마법에 전문가인 로마 가톨릭측의 J. 에크가 먼저 도착하여 라이프찌히 시의회가 제공한 76명 호위병의 호위를 받으며 시가를 왕래했다. 멜랑히톤과 6명의 비텐베르그 일행은 며칠 뒤 도끼로 무장한 200명의 학생들과 함께 도착했다.<ref>Will Durant, The Reformation (Simon and Schuser: New York, 1957), 350 </ref> 토론이 라이프찌히 성의 강당에서 벌어졌다. 첫날 모든 사람은 성 토마스 교회의 여섯 시 미사에 참석했고 오후에는 회의 진행에 관한 규칙들에 관해 논쟁을 벌였다. 한 증인은 당시 논쟁자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마르틴은 중간 키에 걱정과 연구로 몸이 야위어서 살갗 위로 드러난 뼈를 거의 다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남성적 힘에 넘쳤고 가슴에 파고드는 힘찬 목소리(clear, penetrating voice)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학문이 풍부했고 성경을 손 끝에 잡고 마음대로 구사했다. 그는 다정하고 친절했으며 완고하거나 오만하지 않았다. 칼슈타트는 루터보다 키가 더 작고 얼굴은 찌들은 청어(smoked herring) 모습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굵고 불쾌했다. 그의 기억력은 더디었으나 성내는 데는 급했다. 에크는 가슴팍이 벌어진 육중한 몸과 독일어 악센트의 힘찬 목소리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분명하지 못했고 오히려 거칠었다. 그의 두 눈과 입과 얼굴 전체의 모습은 신학자라기 보다는 백정(butcher)을 연상하게 했다.”<ref>[http://www.christiantoday.co.kr/news/178331 [[김명혁]] 칼럼]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 (7)], 크리스천투데이</ref>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