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그레고리오 10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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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단의 분열로 무려 2년 9개월이나 계속된 사도좌 공석 끝에 1271년 9월 1일 테오발도 비스콘티가 교황 클레멘스 4세의 뒤를 이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클레멘스 4세의 선종으로 비테르보에 모인 추기경들은 프랑스파와 이탈리아파로 분열되었다. [[루이 9세]]의 동생이자 클레멘스 4세에 의해 시칠리아 왕으로 등극한 [[카를로 1세]]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파는 자기 나라 사람을 교황으로 선출하려고 하였다. 18개월간 교착 상태가 이어지자 교황 선출이 너무 지연되는 것을 더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비테르보 당국과 시민들은 추기경들이 좀 더 신속하게 결정할 수 있도록 추기경들을 감금하고 그들이 모인 관저의 옥상으로 올라가 지붕을 뜯어내 빵과 물 밖에 주지 않았다. 추기경들은 마지막으로 1271년 8월 양측에 3명씩 총 6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합의하였다. 여섯 명의 추기경들이 추기경들 중 한 명도 선택하지 않자 그들은 외부에서 인물을 모색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리에주의 수석부제를 지낸 테오발도 비스콘티로 결정하였다. 위원회의 결정에 1271년 9월 1일 추기경 전원이 만장일치로 비준하였다. 사실상 이는 프랑스파의 승리나 다름없었다. 테오발도는 프랑스와 가까웠으며, 그의 조카 비체도미노 데 비체도미니스는 엑상프로상스의 대주교이자 카를로 1세의 조언자였기 때문이다.
 
당시 테오발도는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와 함께 팔레스타인의 [[아크레]]에서 제9차 십자군에 종군하던 와중에 이 소식을 듣고 놀랐다. 자신의 임무를 도중에 저버리기를 원치 않았던 테오발도가 자신의 교황 선출 소식을 듣고 첫 번째로 한 행동은 십자군에 대한 지원을 호소한 것이었다. 이탈리아로 떠나기 직전 아크레에서 한 마지막 설교에서 그는 “예루살렘아, 내가 만일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버리리라”는 [[시편]] 137편 5절을 인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그는 추기경들에 의해 교황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하루속히 이탈리아로 돌아가야만 했다. 1272년 1월 1일 테오발도 비스콘티는 브린디시에 이르렀으며, 1272년 2월 초에 추기경들이 기다리고 있던 비테르보에 도착하였다.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자신의 교황 선출을 수용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교황용 깝바를 걸쳤지만 여전히 자신을 교황이 아닌 주교 선출자라고선출자(Episcopus-electus)라고 부름으로써소개함으로써 태도를 조심하였다. 1272년 3월 13일 그는 로마 교황청 일원들과 함께 로마로 들어갔다. 아직 서품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먼저 1272년 3월 19일 사제 서품을 받고 이어서 1272년 3월 27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주교로 서품받고 교황 대관식을 가졌다.
 
==몽골과의 외교적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