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 정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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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중부]](鄭仲夫, 1106년 ~ 1179년) : 고려 명종을 옹립한 뒤 [[무신정권]]을 수립하여 참지정사(參知政事),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가 되었고, 1172년 서북면판사행영병마 겸 중군병마판사(西北面判事行營兵馬兼中軍兵馬判事)가 되었다. 1179년(명종 9) 새로운 실권자 [[경대승]](慶大升)에게 피살되었다.
* [[정정숙 (고려)|정정숙]](鄭旌淑) : 고려 인종조에 형부상서·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응양군(鷹揚軍)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였다. 인종 때 권신인 이자겸의 반대파 인물로 최홍재 등과 뜻을 같이 하였으며, 또한 묘청(妙淸)의 난 때에는 김부식을 보좌하여 서경에 출전하기도 하였다.
* [[정빈철]](鄭彬哲) : 고려조에 판지주사(判知州事)를 역임했다. 경주김씨 예의판서공파 파조 포옹(浦翁) 김남기(金南基)의 장인이다.
* [[정언]](鄭琂) : 고려조에 소부 소윤(少府少尹)을 지내고 정헌대부(正憲大夫)ㆍ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 [[정윤규]](鄭允珪) : 고려조에 정용낭장(精勇郎將) 판예의사사(判禮儀司事)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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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석견]](鄭錫堅), ? ~1500(연산군 6)) : 자는 자건(子健). 호는 한벽재(寒碧齋). 유공(由恭)의 아들이며, 사림파 학자인 붕(鵬)의 작은아버지이다.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안현감ㆍ사간원 정언을 지냈다. 1483년 천추사(天秋使)의 서장관(書將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85년 이조좌랑에 올랐다. 다음해 사헌부지평이 되어 경연(經筵)에서 원사(元史)를 강(講)하는 대신, 경서(經書)를 강할 것을 주청하기도 하였고, 곧 이조정랑으로 옮겨 보덕 허침과 <삼강행실(三綱行實)>을 산정(刪定)하였다. 1489년 사헌부장령으로 승진하였으며, 이때 유자광(柳子光)이 장악원제조로 임용되자 장악원제조는 덕망이 있는 자라야 오를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을 이유로 체직을 요청하였다가 성균관사예로 전직되었으며,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밀양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강경서(姜景敍) 등과 함께 사유(師儒)로 천거되었으며, 의정부 사인의 직에 있으면서 사유에 뽑혔다. 일시 김해부사로 외직에 나갔다가 1493년 동부승지에 임명되었고, 그해 제포(薺浦)에 왜인과 본국인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 문제가 크게 되자 경상도 경차관이 되어 제포에 파견되었으며, 그때 본국인의 심문을 잘못하여 국위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1495년(연산군 1)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병조의 참지ㆍ참의를 역임하였고, 2년 후 대사간을 거쳐 이조참판에 올랐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일찍이 김종직(金宗直)의 문집을 간행하였다 하여 파직 당하였다. 김종직ㆍ정여창(鄭汝昌) 등과 도의교(道義交)를 맺어 성리학을 강론하였고, 성종 때 유도인(有道人) 13인을 천거할 때 그 중의 한 사람에 들었다. 청빈하여 전도(前導)가 없이 다니니 ‘산자관원(山字官員)'이라는 별명을 듣기도 하였다. 선산 경락사(景洛祠)에 제향되었다.
* [[정붕]](鄭鵬, 1469년 ~ 1512년) : 자는 운정(雲程), 호는 신당(新堂). 현감 철견(鐵堅)의 아들이며, 석견(錫堅)의 조카이다. 149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정자ㆍ지평ㆍ정언을 거쳐 1504년(연산군 10) 교리로 있으면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영덕에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다시 교리에 복직되어 상경중 병으로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 뒤 청송부사에 제수되었는데 재임 3년 만에 임지에서 별세하였다
* [[정언각]](鄭彦慤, 1498년 ~ 1556년) : 자는 근부(謹夫). 진사 희검(希儉)의 아들이다. 1516년(중종 11) 생원이 되고, 1533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도승지ㆍ판결사를 거쳐 등을 거쳐 1556년 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 [[정문부]](鄭文孚, 1565년 ~ 1624년) : 조자는 자허(子虛), 호는 농포(農圃). 부사 신(愼)의 아들이다. 1585년(선조 18) 생원이 되고, 1588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1594년 영흥부사에 이어 온성부사ㆍ길주목사ㆍ안변부사ㆍ공주목사를 거쳐 1599년 장례원판결사ㆍ호조참의가 되었고, 그해 중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600년 용양위부호군에 이어 다음해 예조참판, 이어서 장단부사ㆍ안주목사가 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2)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다음해 남원부사가 되고 1612년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외직을 자청하였다. 1623년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전주부윤이 되고, 다음해 다시 부총관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고 있던 중 1624년(인조2) 초회왕(楚懷王)에 대해 지은 시(詩)로 인하여 박홍구의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아 고문 받던 끝에 별세하였다. 뒤에 함북 지방민의 송원(訟寃)에 의해 신원(伸寃)되었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고 충의(忠毅)의 시호를 받았다.
* [[정중만]](鄭重萬, 1658년 ~ 1732년) : 자는 여일(汝一) 호는 백석(白石) 필선 식(植)의 아들 14살에 현종이 인평대군의 아들과 혼인하게 하였고 1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젊어서부터 글씨를 잘 써서 대권안의 여러 편액을 썼다. 1689년 사옹원 직장이 되었다가 익위사 부솔(副率)로 옮겼다. 이듬해 죄없이 철산으로 귀양 갔다가 1694년에 풀려 돌아와 위솔랑(衛率郞) 형조감(刑曹監)으로 승진되고 안음현 현감으로 나가게 되었다. 아껴 쓰고 남는 것으로 제민고(濟民庫)를 처음 만들었다. 황간현감으로 나가 다스리는 일이 가장 뛰어난지라 청도군수로 승진되었다. 이어 함열 양근 진산의 각 군수와 의금부 도사 형조정랑 충훈부도사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 전라도 찰방을 역임하였다. 1728년 한성주부로 원종공신에 참여하여 아버지 필선공을 이조판서로 추증 받게 했다. 또 공조정랑과 사도시 첨정을 지냈다. 현재 정곡빌딩 동·서관 앞의 鄭谷이라는 표석은 공의 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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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 바깥외부 고리링크 ==
* [http://www.hjjeong.org/ 해주정씨 대종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