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그레고리오 10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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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클라베이 시작된 직후 도착한 추기경들에게도 콘클라베에 참여할 자격이 주어지며 마찬가지로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다. 파문된 경우를 제외하고 어떠한 이유에서도 추기경이 선거권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추기경들이 콘클라베에 들어간 후 3일 안에 교황을 선출하지 않으면 추기경들에게 점심과 저녁 중 한 끼만 제공한다.
*콘클라베 기간 동안에는 아무도 파문되거나 추기경들 사이에 뇌물을 주고 받거나 어떠한 약조를 하거나 자신이 교황이 된 후에 무엇을 하겠다고 공약할 수 없다. 콘클라베 기간 동안 추기경들은 교황을 선출하는 것 외에 다른 업무에 일체 관여해서는 안 된다.
*추기경단에서 3분의 2 이상 득표를 받은 사람만이 교황이 된다.
*교황이 선종하면 그 즉시 교황 궁무처장과 교황청 내사원장 및 부원장을 제외한 모든 교황청 기구는 업무를 잠시 중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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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그레고리오 10세는 1275년 4월 리옹을 떠난 후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그는 탈장 증세로 고생하여 로마로 돌아가는 길에 빈번히 멈춰야 했다. 그는 1275년 9월 30일 빈에서 곧바로 출발해 1275년 10월 6일 로잔에 이르렀다.<ref>August Potthast, ''Regesta Pontificum Romanorum'' II (Berlin 1875), p. 1700</ref> 로잔에서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로마왕 [[루돌프 1세]]를 만나, 1275년 10월 20일 그에게서 충성 서약을 받았다.<ref>Pietro Campi, ''Dell' historia ecclesiastica di Piacenza'' II (Piacenza 1662), p. 483.</ref>
 
교황은 재위 초기에는 정치적인 일에 광범위한 경험을 쌓았다. 그리하여 그 당시 [[유럽]]의 여러 문제들을 잘 알게 되었고, 특히 십자군 원정으로 세워진 라틴계 점령지들에 대해 소상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전임자들과는 달리 그는 성지의 세속권에 대해서는 별로 강조하지 않고 교회의 영적 부흥과 기독교 일치 회복 및 유럽의 정치적 질서 회복에 많은 괌심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신성로마제국]]에 대하여 권위를 행사하고 로잔의 [[합스부르크 왕가|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를 승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