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그레고리오 10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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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File:Duomo di arezzo, interno, sepolcro di gregorio X, inizi XIV secolo.JPG|thumb|left|아레초 대성당의 교황 그레고리오 10세 무덤.]]
그레고리오 10세는 1275년 4월 리옹을 떠난 후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그는 탈장 증세로 고생하여 로마로 돌아가는 길에 빈번히 멈춰야 했다. 그는 1275년 9월 30일 빈에서 곧바로 출발해 1275년 10월 6일 로잔에 이르렀다.<ref>August Potthast, ''Regesta Pontificum Romanorum'' II (Berlin 1875), p. 1700</ref> 로잔에서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로마왕 [[루돌프 1세]]를 만나, 1275년 10월 20일 그에게서 충성 서약을 받았다.<ref>Pietro Campi, ''Dell' historia ecclesiastica di Piacenza'' II (Piacenza 1662), p. 483.</ref> 1275년 11월 12일 목요일, 그는 밀라노에 도착했다. 교황 일행은 1275년 12월 5일 레지오에밀리아에 이르렀으며, 같은 해 12월 11일에는 볼로냐에 이르렀다. 체온이 급격하게 올라가고 탈장 증세로 인해 1275년 크리스마스 때 [[아레초]]에서 길을 멈추었다. 그레고리오 9세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졌으며, 결국 1276년 1월 10일 아레초에서 선종하였다. 그의 시신은 아레초 대성당 안에 안장되었다.
 
그의 후임자는 생전에 가깝게 지낸 협력자인 도미니코회원 피에르 드 타랑테즈([[교황 인노첸시오 5세]])가 되었다.<ref>[http://www.csun.edu/~hcfll004/SV1276.html Conclave of 20-21 January 1276 (Dr. J.P.Adams).]</ref>
교황은 재위 초기에는 정치적인 일에 광범위한 경험을 쌓았다. 그리하여 그 당시 [[유럽]]의 여러 문제들을 잘 알게 되었고, 특히 십자군 원정으로 세워진 라틴계 점령지들에 대해 소상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전임자들과는 달리 그는 성지의 세속권에 대해서는 별로 강조하지 않고 교회의 영적 부흥과 기독교 일치 회복 및 유럽의 정치적 질서 회복에 많은 괌심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신성로마제국]]에 대하여 권위를 행사하고 로잔의 [[합스부르크 왕가|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를 승인하였다.
 
무엇보다도 교황은 [[동방정교회]]와 대화를 재개하고 [[1274년]] [[3월 31일]] 제2차 리옹 공의회를 소집하여 [[비잔티움 황제 연대표|비잔티움 황제]] [[미카일 8세]]에게 개인 특사를 보내도록 요청하였다. 교황의 요청으로 공의회는 새로운 십자군 원정을 하기로 결정하고 교황 자신이 많은 자금을 대기로 하였다. 천사적 박사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공의회 참석차 리옹으로 가던 중 죽었고 4개월 후에 [[보나벤투라]]가 7월 15일에 죽었다. 마지막으로 교황의 업적은 교황 선출의 어려움을 개혁한 것으로서 [[1274년]] 7월 7일 공의회 중에 헌장 ‘유비 페리쿨룸’(''Ubi periculum'')을 반포하여 교황 선출에 관한 규정을 공포하였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