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1916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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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참전 전투/전쟁=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서훈 내역= {{욱일장|6}}
|기타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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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찬'''(李鐘贊, [[1916년]] [[3월 10일]] ~ [[1983년]] [[2월 10일]])은 [[일제 강점기]]
그는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여 독재정권에
1937년 6월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남양군도 등지에서
[[여순 사건]]의 유탄을 맞고 [[박정희]]가 숙청될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구명하였다. [[1950년]]의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휴전 후에는 [[이승만]]의 부당한 지시에 저항하였다.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때에는 [[박정희]]의 쿠데타 기도를 파악하여 [[국무총리]] [[장면]]에게 보고했는데, 그는 당시 [[박정희]]의 쿠데타 계획을 눈치챈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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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초반 ===
==== 출생과 소년기 ====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慶州)이다. [[1916년]] [[3월 10일]] [[조선귀족회]] 이사와 부회장을 지낸
재산가인 이하영의 장손이었기에 여유있는 가정에서 자랐으며, [[1921년]] 경성에 근무하는 고위급 일본인 자제들을 위해 세워진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28년]]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1년]] 경성중학교를 졸업했다.
====
[[1933년]] 경성중학 졸업 후에는 일본으로 유학,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37년 6월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49기로 졸업하고 견습사관을 거쳐 [[1937년]] [[일본 제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때는 최전방에서 야전사령관으로 근무했다. 중일전쟁(지나사변)이 일어나자 소대장으로 참전하였고 당시 신문에서 이하영의 손자가 전투에 직접 참전하여 공훈을 쌓았다고 대서특필되었다. 또한 전장에서
1942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 공병대에 배속되어 [[뉴기니 섬]](New Guinea)에 파견되었다. 태평양 전쟁 이후 만주·남양군도 등지에서 복무하였다. 광복 직전인 [[1945년]] 4월 사망한 아버지 [[이규원 (1890년)|이규원]]의 [[조선귀족|자작]] 작위는 습작하지 않았다.▼
광복 직전 일본군 육군 소좌로 진급하였다. 그러나 [[8월]] 패전, 뉴기니에서 귀국 후 일본군 생활을 자괴하는 뜻에서 3년간 낭인생활을 하였다.
▲광복 직전인 [[1945년]] 4월 사망한 아버지 [[이규원 (1890년)|이규원]]의 [[조선귀족|자작]] 작위는 습작하지 않았다.
=== 해방 이후 ===
==== 대한민국 군인 활동 ====
[[1945년]] 귀국하여 은둔하다가 [[1949년]] [[대한민국 육군]]의 대령으로 임관했다. 당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조사를 받았으나,
그는 [[1948년]]부터의 영입 제의를 사양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그와 같은 인재를 왜 기용하지 않느냐며 국방부 장관 신성모를 질타하다시피 하여 중용하라고 이른다. 1949년 6월 22일 국방부 제1국장으로 발탁되었다. 이때 그는 [[여순 사건]]으로 처벌의 위기를 당할 뻔한 박정희를 구제해 주었다. 박정희가 과거 남로당 경력으로 승진때마다 이를 문제 삼을때 일시 부재리의 원칙과 박정희의 청렴함과 군인으로서의 우수한 자질들을 들어 박정희를 변호하고 보호 해줬던 사람의 한 사람이 이종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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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수도방위사령관|육군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되어 [[한국 전쟁]]을 맞았고, 수도사단장과 제3사단장을 역임하며 매우 힘들고 어려운 한국전쟁 초기에 과묵하지만 냉정하고 침착한 지휘와 솔선수범하는 리더십을 발휘하여 휘하 장교들과 병사들의 신임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1950년 7월 수도사단장에 부임할 당시, 전임 수도사단장 [[김석원]]은 자신이 매우 석연치 않은 이유로 물러나는 다소 껄끄러운 상황에서도 후임으로 부임하는 이종찬의 결연한 모습을 보며 크게 안심하며 부하들을 맡겼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50년 9월초 3사단장으로서 포항 부근의 형산강 지역을 맡아 방어중일 때 대대적인 인민군의 공세 앞에서 후퇴가 불가피하게 될 경우 자결한다는 결의로 분전, 끝내 형산강 일대를 지켜냈다. 10월 1일에는 3보병사단 전병력을 이끌고 국군과 UN군 가운데 최초로 38선을 넘어서 북상하기도 했다. 그 뒤 [[제병협동본부]]([[육군보병학교]]의 전신) 본부장을 거쳐 1951년 6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바로 [[대한민국의 육군참모총장|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1952년 5월 [[부산 정치 파동]] 때 대통령 [[이승만]]의 군부대 동원 명령을 거부하여 곧바로 해임되었다. 1952년 5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직선제 개헌을 관철시키려고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자동적으로 계엄사령관이 된 그에게 병력출동을 지시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군의 정치적 중립을 견지하려는 훈령을 내렸다. 이때의 기개 때문에 이종찬에게는 '참군인'이라는 평판이 평생 따라다녔다.
==== 한국 전쟁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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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정변 이후 군정을 비판하다가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을 지지,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장관을 잠시 지낸데 이어, 1961년 7월부터 1967년 9월까지 주 [[이탈리아]] 대사로 근무했다. [[1976년]] 공화당 소속 9·10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1979년]] [[유정회]]로 당적을 옮겼다.
[[1980년]] 국회가 해산되자 예비역 장성 모임인 성우(星友)구락부 회장으로 있으면서 신군부의 집권과 12.12군사반란과 광주 항쟁의 반 역사성을 정면 비판하였다. 유한회사코리아엔지니어링 대표이사사장이 되었고, 이후 [[재향군인회]]고문에 위촉되었으며, 한이협회장, 한일불교협의회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평소 군인의 길만을 걷지 못하고 정치에 입문한 것을 후회하기도 하였다 한다.
=== 최후 ===
[[1983년]] [[2월 10일]]에 사망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통장에는 고작 26만원이 있었고, 당시 그가 입고 있던 옷의 호주머니에는 단돈 2천원이 남아있었다.
=== 사후 ===
장례식은 육군장으로 엄수되어 [[현충원]]에 묻혔다. 보국훈장 통일장이 추서되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일본군 영관급 장교 경력 때문에 선정되었다. [[2009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 가족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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