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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참전 전투/전쟁=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서훈 내역= {{욱일장|6}}
|기타 이력= 친일반민족행위자,[[유신정우회|대한민국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br /> 대한민국 국회의장
}}
'''이종찬'''(李鐘贊, [[1916년]] [[3월 10일]] ~ [[1983년]] [[2월 10일]])은 [[일제 강점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일본군]] 장교 출신의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이다.
 
그는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여 독재정권에 반대했던반대 인물로 [[대한민국]]에서는 '''참군인'''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3347701 한-미 '참군인' 우정 담긴 앨범 공개)</ref>
 
1937년 6월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남양군도 등지에서 복무하다가복무하였고 광복1942년 12월 귀국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뉴기니(New Guinea)에 파견 되었다. 그 이후 일본 패망, 일본군1945년 광복 이후 뉴기니에서 미군에게 생활을억류되어 자괴하는있다가 뜻에서1946년 3년간8월 낭인생활을한국으로 하였다돌아왔다. 그러나 [[1948년]]부터 [[대한민국 국군]]에 진출한 인사들의 거듭된 영입 요청으로 육군 대령으로 특채되어 군생활을 시작하였다.
 
[[여순 사건]]의 유탄을 맞고 [[박정희]]가 숙청될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구명하였다. [[1950년]]의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휴전 후에는 [[이승만]]의 부당한 지시에 저항하였다.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때에는 [[박정희]]의 쿠데타 기도를 파악하여 [[국무총리]] [[장면]]에게 보고했는데, 그는 당시 [[박정희]]의 쿠데타 계획을 눈치챈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
=== 생애 초반 ===
==== 출생과 소년기 ====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慶州)이다. [[1916년]] [[3월 10일]] [[조선귀족회]] 이사와 부회장을 지낸 친일반민족행위자 [[이규원]](李圭元)의 아들로 [[경상남도]] [[진해구|창원군 진해면]]의 친가친척 집에서 출생하였고 [[경성부]] 본가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대한제국]]의 외무대신, 법부대신을 지냈고 [[한일 병합 조약]] 체결 과정에서 일본에 협력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이하영]]의 손자였다.
 
재산가인 이하영의 장손이었기에 여유있는 가정에서 자랐으며, [[1921년]] 경성에 근무하는 고위급 일본인 자제들을 위해 세워진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28년]]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1년]] 경성중학교를 졸업했다.
 
==== 일본 군인 활동친일반민족행위 ====
[[1933년]] 경성중학 졸업 후에는 일본으로 유학,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37년 6월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49기로 졸업하고 견습사관을 거쳐 [[1937년]] [[일본 제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때는 최전방에서 야전사령관으로 근무했다. 중일전쟁(지나사변)이 일어나자 소대장으로 참전하였고 당시 신문에서 이하영의 손자가 전투에 직접 참전하여 공훈을 쌓았다고 대서특필되었다. 또한 전장에서 [[일왕]] [[일본 천황]]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내용으로 지은 그의 진중시(陣中詩)가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는 일본군 최고훈장인 금치훈장을 받았다.
 
1942년 도쿄의 육군포공학교(陸軍砲工學校)에 있다가 12월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뉴기니(New Guinea)에 파견되어 독립공병 제4중대에 소속되었고, 1943년 7월부터는 일본군 제17군 남해지대 소속의 독립공병 제15연대에서 복무했다. 같은 해 12월 육군 공병 소좌로 진급해 1944년부터 독립공병 제15연대장 대리로 복무했다.
1942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 공병대에 배속되어 [[뉴기니 섬]](New Guinea)에 파견되었다. 태평양 전쟁 이후 만주·남양군도 등지에서 복무하였다. 광복 직전인 [[1945년]] 4월 사망한 아버지 [[이규원 (1890년)|이규원]]의 [[조선귀족|자작]] 작위는 습작하지 않았다.
 
그러나 [[8월]] 일본 패전, 1945년 광복 이후 뉴기니에서 미군에게 억류되어 있다가 1946년 8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광복 직전 일본군 육군 소좌로 진급하였다. 그러나 [[8월]] 패전, 뉴기니에서 귀국 후 일본군 생활을 자괴하는 뜻에서 3년간 낭인생활을 하였다.
 
1942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 공병대에 배속되어 [[뉴기니 섬]](New Guinea)에 파견되었다. 태평양 전쟁 이후 만주·남양군도 등지에서 복무하였다. 광복 직전인 [[1945년]] 4월 사망한 아버지 [[이규원 (1890년)|이규원]]의 [[조선귀족|자작]] 작위는 습작하지 않았다.
 
=== 해방 이후 ===
==== 대한민국 군인 활동 ====
[[1945년]] 귀국하여 은둔하다가 [[1949년]] [[대한민국 육군]]의 대령으로 임관했다. 당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조사를 받았으나, 친일파처벌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일본 군인이 되었다는 것 외에는 아직 젊은 나이였기에 별다른 특이점은 찾을 수가 없어 특별한 처분을 받지는받지 않았다.
 
그는 [[1948년]]부터의 영입 제의를 사양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그와 같은 인재를 왜 기용하지 않느냐며 국방부 장관 신성모를 질타하다시피 하여 중용하라고 이른다. 1949년 6월 22일 국방부 제1국장으로 발탁되었다. 이때 그는 [[여순 사건]]으로 처벌의 위기를 당할 뻔한 박정희를 구제해 주었다. 박정희가 과거 남로당 경력으로 승진때마다 이를 문제 삼을때 일시 부재리의 원칙과 박정희의 청렴함과 군인으로서의 우수한 자질들을 들어 박정희를 변호하고 보호 해줬던 사람의 한 사람이 이종찬이었다.
1950년 [[수도방위사령관|육군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되어 [[한국 전쟁]]을 맞았고, 수도사단장과 제3사단장을 역임하며 매우 힘들고 어려운 한국전쟁 초기에 과묵하지만 냉정하고 침착한 지휘와 솔선수범하는 리더십을 발휘하여 휘하 장교들과 병사들의 신임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1950년 7월 수도사단장에 부임할 당시, 전임 수도사단장 [[김석원]]은 자신이 매우 석연치 않은 이유로 물러나는 다소 껄끄러운 상황에서도 후임으로 부임하는 이종찬의 결연한 모습을 보며 크게 안심하며 부하들을 맡겼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50년 9월초 3사단장으로서 포항 부근의 형산강 지역을 맡아 방어중일 때 대대적인 인민군의 공세 앞에서 후퇴가 불가피하게 될 경우 자결한다는 결의로 분전, 끝내 형산강 일대를 지켜냈다. 10월 1일에는 3보병사단 전병력을 이끌고 국군과 UN군 가운데 최초로 38선을 넘어서 북상하기도 했다. 그 뒤 [[제병협동본부]]([[육군보병학교]]의 전신) 본부장을 거쳐 1951년 6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바로 [[대한민국의 육군참모총장|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1952년 5월 [[부산 정치 파동]] 때 대통령 [[이승만]]의 군부대 동원 명령을 거부하여 곧바로 해임되었다. 1952년 5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직선제 개헌을 관철시키려고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자동적으로 계엄사령관이 된 그에게 병력출동을 지시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군의 정치적 중립을 견지하려는 훈령을 내렸다. 이때의 기개 때문에 이종찬에게는 '참군인'이라는 평판이 평생 따라다녔다.
 
==== 한국 전쟁 이후 ====
군사 정변 이후 군정을 비판하다가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을 지지,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장관을 잠시 지낸데 이어, 1961년 7월부터 1967년 9월까지 주 [[이탈리아]] 대사로 근무했다. [[1976년]] 공화당 소속 9·10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1979년]] [[유정회]]로 당적을 옮겼다.
 
[[1980년]] 국회가 해산되자 예비역 장성 모임인 성우(星友)구락부 회장으로 있으면서 신군부의 집권과 12.12군사반란과 광주 항쟁의 반 역사성을 정면 비판하였다. 유한회사코리아엔지니어링 대표이사사장이 되었고, 이후 [[재향군인회]]고문에 위촉되었으며, 한이협회장, 한일불교협의회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평소 군인의 길만을 걷지 못하고 정치에 입문한 것을 후회하기도 하였다 한다.
 
=== 최후 ===
[[1983년]] [[2월 10일]]에 사망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통장에는 고작 26만원이 있었고, 당시 그가 입고 있던 옷의 호주머니에는 단돈 2천원이 남아있었다.
 
=== 사후 ===
장례식은 육군장으로 엄수되어 [[현충원]]에 묻혔다. 보국훈장 통일장이 추서되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일본군 영관급 장교 경력 때문에 선정되었다. [[2009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이종찬의 친일반민족행위 활동은「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제2조 제10·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4: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269~276)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4: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자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친일인명사전』3 (민족문제연구소, 2009)
 
== 가족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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