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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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 내무장, 재무장 등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년]] [[8·15 광복|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이승만]], [[김성수 (1891년)|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48년]] [[1월]]부터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에게서 받은 정치 자금을 사회주의자들에게 운반하던 [[김립 (1880년)|김립]]을 암살했고, 자신의 부하였다가 사이가 틀어진 [[안공근]]의 암살 배후 의혹을 받기도 한다. 해방 후에도 [[존 하지]], [[브루스 커밍스]] 등에 의해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의 암살 배후로 지목되어, 송진우 암살 직후 [[미 군정|군정]]청 사령관 [[존 하지]]에 의해 경고를 받기도 했다. [[1947년]] [[12월]] 장덕수 암살 사건 때는 현장에서 [[한국독립당]]원이 검거돼 재판정에 서기도 했다. [[1948년]]에는 반(反) 이승만 쿠데타 기도 의혹을 받기도 했다. 또한 김구는 김성수의 암살을 기도<ref name="seo535">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535</ref>하려다 실패하고 이것이 미 군정의 첩보에 입수되기도 했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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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우 (정치인)|송진우]], [[장덕수]] 등의 암살 배후 의혹 외에도 [[김성수 (1891년)|김성수]] 암살 미수의 배후로도 지목되었다.
 
[[미 군정]]의 보고서<ref name="ReferenceB">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6) 532</ref> 에 의하면 김구는 [[김성수 (1891년)|김성수]]의 암살을 기도<ref name="seo535">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535</ref> 해왔다 한다. 그는 [[한민당]]과 [[한독당]]의 통합에 찬성하였지만 김구측에 의한 [[김성수 (1891년)|김성수]] 암살 기도<ref name="seo535"/> 가 미수로 끝나면서 [[한민당]]측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을 노골적으로 증오하게 되었다.
 
[[김성수 (1891년)|김성수]]는 불쾌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내심 분개했고, 김구에 대한 한민당과 그 후신들의 시선 역시 곱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