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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준'''(宋秉畯, {{ja-y|野田 秉畯||のだ へいしゅん 노다 헤이슌}}, 개명전 {{ja-y|野田 平次郎||のだ へいじろう 노다 헤이지로}}<ref>광복회, [http://www.kla815.or.kr/japanese.php 반민족행위처벌법에 근거한 친일반민족 행위자 명단] (2002년 2월 28일)</ref>, [[1857년]] [[10월 7일]]([[음력 8월 20일]]) ~ [[1925년]] [[2월 1일]])은 [[조선]] 말기에 활동한 무관 정치인으로, [[정미칠적]] 중 한 사람이며 [[한일 합병 조약]] 체결 과정에서도 [[일진회]]를 통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무과]] 급제 후 무관으로 활동하다가 [[김옥균]]을 암살 밀명을 받고 [[일본]]에 건너갔지만 오히려 김옥균에게 감화되었고 그의 동지가 되면서 [[개화파]] 정치인이 되었다.<ref name="sik132">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 2》 (인물과 사상사, 2007) 132페이지</ref> 그러나 뒤에
대일본제국 시절에
▲}}</ref> 그 는 조선 말기 무관이자 정치인 이며 호는 제암(濟庵)이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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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설에 의하면 그는 은진 송씨라고는 하나 그것을 증명할 족보 등의 문서가 실존하지 않는다고 한다. 당시엔 성씨 도용이 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함경남도]] [[장진군]] 출생, 어머니 홍씨는 양자로 들어간 [[민태호 (1834년)|민태호]]의 첩인 기생 홍씨로 알려져 있으며 서출이었다. 이후 [[민영환]]의 식객 생활을 하게 된다.
[[서자]]에 어머니가 기생이라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다가 잠시 서당에 나가 한학을 수학하였다.
|저자=임종국
|기타=반민족 문제 연구소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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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63쪽}}</ref>
1876년 [[강화도 조약]] 때 접견사 수행원으로서 구로다 일행을 접대하였다. 그 뒤 송병준은 구로다 일행을 따라온 일본의 무역회사 대창조 사주인 오오쿠라와 합작하여 부산에 상관을 차렸다. 이는 조선 역사상 최초의 한일 합작 상회인 셈이다. 당시 국법에 따르면 일본인과 합작하여 상행위를 할 수
==== 전향과 일본 망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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