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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한 습격 기사의 전말 ==
[[49년]]에 장수를 보내 후한의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군|태원]]을 습격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이 기사의 원전인 《[[후한서]]》에는 그 주체를 [[요동]] 밖 변방의 맥인(貊人)이라고만 하였고<ref>《후한서》1권下 [[후한 광무제|광무제]] 유수 [[건무 (후한)|건무]] 25년</ref> 그 거리가 매우 먼데다 고구려는 아직 [[국가]]의 기틀도 확립하지 못한 상태였으며 치열한 왕위 쟁탈전으로 내정이 불안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오환]] 또는 [[선비 (민족)|선비]]를 고구려로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다.<ref>池內宏(이케우치 히로시), 〈高句麗王家の上世の世系について〉, 《東亜学》3, 1940. [[이병도]], 《삼국사기》, [[을유문화사]]</ref> 이와 달리 고구려의 습격을 긍정하거나<ref>박세이, 〈고구려 태조왕대 이전의 선비 관계〉, 《지역과 역사》vol.30, 부경역사연구소, 2012</ref> 태원만이 오기라는 설도 존재하기는 한다.<ref>이재성, 〈고구려와 읍락연맹시기의 선비〉, 《동국사학》vol.37, 동국사학회, 2002, pp.467-468.</ref> 혹은 《후한서》 동이열전에서는 구려(句驪)의 행위라고 한 점을<ref>《후한서》85권 열전 제75 고구려</ref> 들어 고구려의 지배 밖에 있던 원고구려인이라고도 한다.<ref>윤병모, 〈AD.2세기 이전 고구려의 요서원정〉, 《국학연구》vol.17, [[한국국학진흥원]], 2010</ref> 다만 소수설의 경우에도 오환 내지 선비의 협조는 기본 전제로 깔고 있다. 한편 습격의 성격이 [[영토]] 확장이 아닌 [[약탈]]이라는 데에는 대체로 합치하고 있다. 근데 충격적인 내용이 나왔는데
 
== 민중왕과의 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