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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16세에 부황 경제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올라 유학자 [[동중서]](董仲舒)의 의견을 수렴하여 유학을 국가의 학문으로 삼아 그 이념대로 나라를 다스리려 하였다.
 
한편 이복 형제와 귀족을 제거하여 황제권을 강화시켰다. 이복형제들을 물리치고 제위에 올랐으며, 강력한 경쟁자이며 제위 계승의 라이벌로 지목되던 [[유승 (중산정왕)|중산정왕 유승]]을 계속 의심하였는데, 유승은 [[전한 경제|경제]]의 서자이자 무제의 이복형이었다. 유승은 이 의심을 피하고자 일부러 주색에 탐닉하는 모습을 보여 한무제의 칼날을 피해갔다. 또한 즉위 후 전대의 권신들과 외척들을 숙청, 면직시키고 실력과 능력으로 어질고 겸손한 인재를 채용하여 관료의 자질을 향상시켰다.
 
그의 즉위 후 최대 사업으로 치세에 [[장건]](張騫)이 서역과 통하는 [[실크로드]] 건설을 시작하였다. 이후 치세기간 중 실크로드 건설 개척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고, [[위청 (전한)|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 등으로 하여금 [[흉노]]를 소탕케 하였다. 인재 채용에 조건과 자격을 가리지 않아 서역 출신 노예와 흉노 출신 노예 중에서도 인재를 등용하였다. 흉노를 소탕하면서 [[곽거병]]이곽거병이 사로잡은 흉노족 왕자 출신 노예 [[김일제]](金日磾)의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 발탁하기도 했다. 그 외에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어 유학에 중점을 두고 학문을 강하게 하였으며, BC 127년부터 황제의 여러 아들들을 제후왕으로 분봉(分封)하여 중앙집권화하였다. 그외의 직할령은 전국을 13주(州)로 나누고, 주마다 자사(刺史)를 두어 군수를 파견하여 감독케 하였다.
 
=== 정벌 사업 ===
운하를 굴착하여 농지의 관개와 운송을 도왔다. 대외적으로는 [[장건(張騫)]]을 대월지국(大月氏國)으로 파견하고, 장군 위청, 곽거병, [[이광 (전한)|이광]](李廣) 등에게 흉노를 토벌시켜 흉노족 선우를[[선우]]를 사살하고 다수 흉노족을 포로로 잡아왔다. 기원전 119년에는 [[위청]]을위청을 시켜 [[흉노]]를흉노를 외(外)몽골로 내쫓고 오르도스 지방을 회복하여 2군을 두었다. 하서(河西)에 있던 흉노 [[혼야왕]](渾邪王)도 항복했으므로, 그 곳에 무위·장액·주천·돈황 4군(하서사군)을 두어 중앙아시아와의 교통로를 확보하고, 서역 제국의 입공(入貢)이 계속되었으나, 기원전 104년에는 [[이광리]](李廣利)에게 명해 [[파미르 고원]] 북서에 있는 [[대완국]](大宛國:[[페르가나]])을 정벌하게 했다. [[흉노]]의흉노의 방위와 서역 유지를 위해 요지로 한인을 이주시키고, 또 [[둔전]](屯田)을 두었다.
 
남방으로는 푸젠성[福建省[푸젠성]]에 있던 민월과 동월(東越) 두 왕국을 병탄·흡수하고, 기원전 111년에는 번우(番:廣東)에 도읍한 [[남월국]]을 멸망시켜 9군을 두고, 쓰촨성[四川省[쓰촨성]] 변경에서 윈난[雲南[윈난]구이저우[貴州[구이저우]] 방면에 이르는 염(冉)·방(駹)·수(嶲)·작(莋)·야랑(夜郞)·전(滇) 등의 종족을 귀순시켜, 그곳에 6군을 두었다.
 
또한 [[기원전 112년]]부터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한 진국(辰國)과의 직접 교역을 반대하고 한나라에 조공 바치기를 거부하는 [[고조선]]으로의 침략을 단행한다. 무제는 여러 차례 육로와 해로로 육군과 수군 군사를 파견하였으나 모두 패하였다. 그러나 [[고조선]]은고조선은 내부의 분열로 한군에 투항자가 발생하면서 멸망하게 되었다(추측). [[기원전 108년]] [[왕검성]]을 함락시키고 [[고조선]]을고조선을 멸망시킨 요동지역에 낙랑·임둔·진번·현도의 [[한사군]]을 설치하였다.<ref>[[#사마천 115|사마천]] 〈권115〉 “왕검성(王險城)이 항복하지 않으니, 고(故)로, 우거의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또한 모반하여, 다시 벼슬아치를 공격하였다.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항(長降)과 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그 백성을 하소연하고 타일러, 성기를 죽이니 이로써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四郡)이 되었다.”/ “王險城未下,故右渠之大臣成巳又反,復攻吏。左將軍使右渠子長降、相路人之子最告諭其民,誅成巳,以故遂定朝鮮,為四郡。”</ref>
 
=== 내정 ===
활발한 정복 전쟁으로 한 무제는 재정이 궁핍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따라서 소금과 철과 황, 술의 전매제를 시행하여 경제적 재력 확충을 시도하였다. 토지분배 정책에서는 [[둔전제]]를 강력히 시행·추진하였고, 둔전제의 일부를 개정하여 정복한 북방지역에 주민의 이주를 적극 장려하면서 북방으로 이주한 백성에게 땅을 나누어 주는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를 대전법(代田法)이라 한다.
 
외적에 성공한 반면, 궁전과 이궁을 짓고, [[불로장생]]을 믿어 방사(方士)를 모아, 태산(泰山)에서 봉선의식(封禪儀式)을 치르고 각지를 순행했으므로 백성들의 원성을 듣기도 했고 군사비를 압박했다. 상홍양은 증세·신세(新稅)에다 소금[鹽]·철(鐵)을철을 전매하고 균수법(均輸法)·평준법(平準法)을 제정하였다. 균수는 관청에서 상업활동을 하는 것이고 평준은 물가를[[물가]]를 조절하는 것이다. 그는 이런 정책을 통해 부유한 상인의 매점매석을[[매점매석]]을 근절해서 물가를 안정시켰다.<ref>위안싱페이 저, 장연 역, 《중국문명대시야 1 (中华文明大视野)》김영사(2007) 373쪽 ISBN 978-89-349-2736-5</ref> 무공작(武功爵)을 팔기도 하여, 관리의 부정이 심해지고, 국민의 생활도 궁핍해져 각종 반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ref>출처필요</ref>.
 
=== 황제권 강화와 후계 인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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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는 [[무사황후|위황후]]를 폐출하고 자결하게 하였다. 무제는 여태자의 장인과 장모, 처족, 위황후 일족에게 연좌율을 적용하여 사형에 처하였다. 여태자의 손자이자 무제의 증손은 여태자의 처조모의 친정으로 빼돌려졌다.
 
[[여태후]]의여태후의 친정 일가들의 폐단을 보았던 한무제는 [[여태자]] 일가를 역모로 처단한 뒤, [[유박 (창읍애왕)|창읍애왕]]마저 [[기원전 88년]] 죽자, [[구익부인]] 조씨 소생 [[유불릉|전한 소제]]를 후계자로 결정한다.
 
총애하는 후궁이었던 [[구익부인]]이구익부인이 14개월 또는 24개월 만에 아들을 낳자 요임금의 어머니가 14개월 만에 출산한 것을 예로 들어가며 총애를 더하였지만 아들 불릉을 황태자로 세운 뒤 어린 아들 뒤에 젊은 어미가 있으면 외척의 발호와 폐단이 있을 것이라고 하여 구익부인을 역모로 몰아 살해하였다. 만년에는 외정을 중지하고, 내치에 치중하였으며 세금감면 정책을 추진, 다시 먼 거리에 있는 윤대(輪臺:[[신장웨이우얼자치구]])의 둔전(屯田)을 폐지, 백성을 다스리는 데 힘썼다. 무제 때의 특색은 중앙집권화와, 밖으로 지역이 확대되고, 특히 중앙아시아를 통해 동서교섭이 왕성하게 되는 기틀을 열어놓았다.
 
권신이나 외척을 배제하고 실력에 따른 인재등용을 하였다. 출신 배경이 한미한 관료들을 등용했고, 흉노족 원정시 포로로 잡혀온 김일제 등 이민족 포로 중에서도 능력이 되는 인재를 채용하였다. 그 뒤 임종이 가까워 오자 [[곽광]](霍光)과 [[김일제]]를 불러 아들의 후견인이 되어 줄 것을 유언하고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