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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위 ===
그리하여 [[1298년]](충렬왕 24년)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고, 부왕(父王)은 [[태상왕]](太上王)이라 했다. 젊은 왕은 구폐를 개혁하고 새로운 정치를 실행하려 하였으나 권문세가의 비방을 많이 받았다. 정국(政局)의 쇄신을 꾀하고 먼저 관제를 개혁하던 무렵에 조비(趙妃)를 질투해 오던 왕비 계국공주와 왕의 반대파가 음모 사건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충선왕]] 즉위 7개월 만에 다시 충렬왕이 복위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왕실의 치정 문제도 관계되지만, 충렬·충선 두 왕을 둘러싼 정치적 모략과 중상의 결과로 보인다.
 
충선왕이 왕위를 아버지 충렬왕에게 반환한 뒤 원나라로 간 뒤에도 그에게 원한을 품은 [[왕유소]]·[[송린]]·[[석천보]] 등이 그를 모함하여 두 부자를 이간시켰으며, 계국공주의 재가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오히려 처형되었다. 충선왕은 다시 즉위할 때까지 10년간 계국공주와 원나라 서울에 머물면서 후에 [[원 무종]]이 되는 회령왕(懷寧王) [[카이산]](海山)과 [[원 인종]]이 되는 태자 [[아유르바르와다]](愛育黎拔力達)와 친하게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