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세스 2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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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이집트의 파라오#제19왕조|이집트 제19왕조의 제3대 파라오]]
}}
'''람세스 2세(世)'''({{lang|en|'''RamsesRamesses II'''}}, ? ~ ?)는 [[고대 이집트]] 제19왕조 제3대 파라오(재위:[[기원전 1279년]] ~ [[기원전 1213년]])이다.
 
그의 치세 동안 이집트는 [[리비아]], [[누비아]], [[팔레스타인]]까지 세력을 확장해 번영하였다. 그는 호전적인 히타이트와 전쟁에서 명성을 얻었는데, 그 후 그들과 평화롭게 되었다.<ref>{{서적 인용 |제목= The Pageant of World History | 저자= Gerald Leinwand |연도=1986 |출판사=Allyn & Bacon |장=Prologue: In Search of History |쪽= 13 |id=ISBN 978-0-205-08680-1|인용문= Ramses II won fame for fighting the warlike Hittites, although he eventually made peace with them.}}</ref> '''람세 2세''', '''라메세스 2세'''라고도 표기되었다. 람세스란 이름은 [[라 (신화)|라]]에 의해 태어났다는 의미를 가진 '라 메스 시스'의 그리스어 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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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연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대체적으로 24세에 즉위하여 66년간 통치한뒤 90세에 죽은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사이 첫 번째 왕비 [[네페르타리]]와 여러명의 왕비 및 측실과의 사이에서 현자(賢者)로써 명성이 높았던 카엠와세드, 후계자였던 메르에프타하를 시작으로 매우 많은 자식들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일부에서는 그들 대부분이 양자이며 왕의 아들이란 칭호를 하사받은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무엇보다 람세스왕의 전용 활이라 불리는 커다란 강궁이 남아 있는데, 왕 이외에는 아무도 당기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을정도로 뛰어난 전사였던 그가 많은 자식을 남기지 않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아, 역시 그들은 왕의 친자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치세 전반기에는 [[히타이트]]와 팔레스타인을 사이에 두고 세력을 다투었다. [[기원전 1286년1274년]] [[카데쉬 전투]]에서 직접 출정하여 히타이트 왕 [[무와탈리 2세]]와 전투를 벌였다. 이집트는 카데쉬 전투에서 거짓정보에 속은 결과, 주력 군단이 괴멸당할정도의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후 전투의 결과에 대해서는 양측의 기록이 달라 아직까지 논란의 대상이다. 하지만 히타이트 세력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내지는 못했다. 양쪽은 서로 상대를 물리치지 못하고, 장기간 전쟁을 계속하던 중 람세스 2세의 재위 21년째인 기원전 1269년에1258년에 이집트와 히타이트 사이에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휴전하였다.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 왕녀를 왕비로 맞이하였다. 이것은 세계사에서 최초의 평화조약이라 평가했다. 또한 카데쉬 전투에 대한 람세스 2세의 승리선전은 이집트군의 군사제도 개혁을 방해했기에 훗날 재앙의 불씨로 남게 되었다.
 
람세스 2세는 또한 나일 제 1강을 넘어 누비아로 원정을 떠났다. 람세스 2세는 전승 기념비를 많이 세웠고, 현재도 기념비의 상당수가 남아있는 파라오가 되었다. 누비아는 후에 이집트에 동화되어 본가 이집트의 쇠퇴를 구원하는 형태의 왕조를 세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