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 (1383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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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과 관력: 1453년 (단종 1년), 향년 7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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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김종서 (1383년)|김종서]]는 휘하 병사들에게 잡일을 많이 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김종서는 [[조선 태종|태종]]과 [[조선 세종|세종]], [[조선 문종|문종]], [[조선 단종|단종]]을 모셔온 충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그의 위세는 웬만한 권신들도 잡지 못할 만큼이었으며, [[의정부서사제]]를 명분으로 만천하를 호령하였다. 또한 관료로서 국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면서 성장하게 되자, 그의 위세는 범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세종이 세손(단종)을 정사에 능한 원로대신에게 위탁하려는데 황희는 이미 아흔 살의 고령이라 그나마 일흔의 김종서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황희(黃喜)는 이 때를 내다보고 김종서를 길렀으나 정권을 무리하게 행사함을 생각치 못하였다. 그러한 위세는 단종이 즉위하면서 더욱 심하여져 ‘그의 전횡과 독단이 너무 심하다’라는 명나라 사신의 평을 받기도 하고, '성상위에 좌상'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가령 김종서의 전횡에 대한 기록을 보면, ' 황보인이 조상의 묘(墓)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고향에 갈 때 전송하는 자들이 구름과 같이 많았으나, 김종서가 갈 때보다는 많지 않았다'.라는 것과 사위와 아들이 '특진'제도 때문에 파격적인 승진을 했다는 정도이다. 그리고, 소극적인 황보인과, 황보인과 김종서의 눈치 살피기에 급급한 정분에 의해 결국 주요 결정은 김종서의 몫이었고, 그만큼 위세가 높은 것이었다. 권력의 중심에서 만천하를 호령한 그지만, 절대로 남용을 목적으로 잡은 정사가 아니였고 그 때문에 [[수양대군]]도 김종서를 바로 해칠 수 없었다. 그의 섭정은 [[황보인]]과 [[정분]]등 정승들과 당시의 6판서들의 존재를 무시한다라는 평가도 있다. 3정승 체제에 정승들도 견제를 받을 만큼 누가 독단을 펼치기 어려운 정치구조로 됐을 만큼 세력을 잡고있었다. 그러나 전횡과 독단으로 인해 김종서가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는 기록 등은 전혀 없다. 김종서를 역적으로 몰아 쓴 [[단종실록]]에서도 그가 서대문 밖에 집이 있었는데 그 집이 호화로웠다는 표현조차 보이질 않는다. 어런이런 정황들은 그가 엄청난 권력을 지녔으면서도 공인으로서 절도를 잘 지켰음을 보여준다.
 
== 문학 작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