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핀 2세 (상리스):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4번째 줄:
[[베른하르트 1세]]의 아들인데 그의 어머니가 랑 출신 쿠니군데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의 아버지 [[베른하르트 1세]]는 [[817년]] [[루트비히 1세 (프랑크)|경건왕 루트비히]]의 제국 칙령에 반발, 군사를 일으켜 [[루트비히 1세 (프랑크)|경건왕 루트비히]]에게 반항하였다가 붙잡혀 눈이 뽑히는 형벌을 받고 장님이 되었다가 [[818년]] 봄, 사망했다. 피핀의 초기 삶,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834년]]부터 [[840년]] 무렵에 [[베르망두아]][[백작]]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834년]] 무렵 [[프랑스]]에 해당되는 지역인 [[세느 강]] 북쪽의 [[베르망두아]] [[백작]]이 임명되었다. 834년 [[로타르 1세]]가 아버지 [[루트비히 1세 (프랑크)|경건왕 루트비히]]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을 때, 로타르를 지지하였다.
 
834년 [[루트비히 1세 (프랑크)|경건왕 루트비히]]의 계비 [[유디트 폰 바이에른]]이 [[이탈리아]]의 코르토나 수도원(Cortona)에 갇혔을 때 피핀은 다른 [[롬바르디아]] 귀족들과 함께 유디트를 빼내어 [[아헨]]에 있는 [[루트비히 1세 (프랑크)|경건왕 루트비히]]에게로 데려왔다. 그 보상으로 [[836년]] 피핀은 [[루트비히 1세 (프랑크)|경건왕 루트비히]]에게 [[생 캉탱]][[백작]]과 [[페로네]], [[상 리스]] [[백작]]직과 영지를 받았다.
그는 [[페로네]]와 [[생 캉탱]], [[상 리스]] 등의 영지를 보유할 수 있었다.
 
상리스의 피핀 2세는 [[840년]] [[루트비히 1세 (프랑크)|경건왕 루트비히]]가 사망하기 직전 그의 장남 [[로타르 1세]]가 아버지 [[루트비히 1세 (프랑크)|경건왕 루트비히]]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을 때 로타르의 편에 가담해 지원하였다. 경견왕 루트비히 사후, [[대머리왕 카를]] 등이 로타르 1세와 대적했을 때도 그는 로타르 1세의 편에 섰다.<ref>Nithard, Historiarum Libri II, hrsg. von Hahn in MGH SS 2 (1829), S. 656</ref> 그러나 [[843년]] [[베르덩 조약]]이 체결되었고, 그 이후 그의 지위는 박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