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고 (알자스 공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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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소년 시절 ===
[[File파일:Lotharingia-959.svg|thumb|right|200px|[[로타링기아]] 지도, 그의 영지인 [[알사스]] 지역은 하늘색 부분]]
 
위그는 [[855년]] 혹은 [[850년]]에 [[로타링기아]]의 왕 [[로타르 2세]]의 서자로 출생하였다. [[로타르 1세]]에게는 손자가 된다. 그의 출생년대에 대해서는 [[860년]]생 설도 있으며, 생일은 미상이다. 정비 [[토이드베르가]]에게서 아들이 없던 [[로타르 2세]]는 [[발트라다]]에게서 아들 위그와 딸 기셀라, 베르타를 얻었다. 그의 외가는 지체가 낮은 신분이었기에 할아버지 [[로타르 1세]]는 [[발트라다]]와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부왕 사후, [[로타르 2세]]는 발트라다가 자신의 아들을 낳아주자 왕비인 토이드베르가와 이혼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교황 니콜라오 1세]]는 이를 거부했고 오히려 [[로타르 2세]]와 [[토이드베르가]]를 화해시키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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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위 회복 운동 ===
그의 영지인 [[알자스]]는 [[870년]] [[루트비히 2세 (동프랑크)|독일인 루트비히]]의 [[동프랑크 왕국]] 내에 있었으므로 [[루트비히 2세 (동프랑크)|독일인 루트비히]]는 그의 [[알자스]] 공작직을 박탈했다. 고아가 되어 외가가 있던 [[보름스가우]]에 있다가 나중에 영지인 [[알사스]]로 갔다. [[중프랑크 왕국]]의 황제 [[루트비히 2세 (이탈리아)|이탈리아인 루트비히]]가 죽고 [[이탈리아]]를 놓고 [[루트비히 2세 (동프랑크)|독일인 루트비히]]와 [[카를 2세 (서프랑크)|대머리왕 카를 2세]]가 전쟁을 벌일 동안 그는 알자스 공작직을 회복했다.
 
[[877년]] 이후 그는 여러 번 반란을 일으켜 자신의 왕위를 되찾으려 했다. [[877년]] [[10월]] [[카를 2세 (서프랑크)|대머리왕 카를 2세]]가 죽자 [[로트링겐]]의 귀족들이 그를 지원했고 이를 기회로 [[로트링겐]] 왕이 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으나 [[작센]]의 군주 [[프랑크의 루트비히 2세|소 루트비히]]의 방해로 실패했고, 그 뒤로도 878년, 880년 여러번 부왕의 영지를 되찾으려 기도했으나, 그때마다 번번히 실패하였다.
 
[[877년]] [[10월]] [[대머리왕 카를]]이 죽은 뒤 그는 자신이[[로타르 1세]]의 직계후손임을 내세워 [[이탈리아]]의 왕위를 요구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탈리아의 귀족들과 제후들은 그를 지지하지 않았고, 교황은 [[이탈리아]]의 왕관을 [[동프랑크]]의 [[카를만]]에게 넘겨주었다. [[878년]]초 [[교황 요한네스 8세]]는 위그가 사생아라는 것과 위그의 파문을 선언하고 추방했다. [[879년]] [[서프랑크의 루이 2세]]가 사망하자 그의 죽음을 계기로 이번에는 [[로트링겐]]의 서부 지역을 차지하고 이어 [[서프랑크]]의 왕위를 차지하려 하였으나, [[루트비히 3세 (동프랑크)|청년 루트비히 3세]]가 보낸 군사들이 [[루이 3세]]와 [[샤를로망]]을 보호하였으므로 실패했다. 동시에 그의 군대는 [[알레만니]]의 왕이자 그무렵 [[이탈리아의 군주]]에 즉위한 [[카를 3세 (동프랑크)|뚱보왕 카를]]의 군사에 의해 격파되었다. [[프랑크의 루트비히 3세|청년 루트비히]]는 수도원에 있던 그를 호출하였으나, 그는 [[프랑크의 루트비히 3세|소루트비히]]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880년 그는 다시 로타링기아를 회복하려 군사를 일으켰지만 실패하였다. 880년 소 루트비히가 [[베르덩]]에 있는 위그의 성을 침략하여 파괴하고 돌아갔다. 그뒤 [[카를 3세 (동프랑크)|비만왕 카를 3세는]] 그를 [[메츠]] [[주교]]직에 임명하고 주교 교구를 그에게 주었다.
 
=== 감금과 최후 ===
[[File파일:843-870 Europe.jpg|thumb|right|200px|[[베르덩 조약]]과 [[메르센 조약]]<br/>노란 색 부분 중 이탈리아와 프로방스를 제외한, 독일, 프랑스에 의해 분할표시가 된 지역이 아버지 [[로타르 2세]]의 영지였다.]]
 
882년 초 [[부활절]]에 [[프랑크의 루트비히 3세|청년 루트비히]]가 그를 소환했지만 거부하였고 소 루트비히는 [[알사스]]를 공격, [[부르고뉴]]까지 그를 추격했다. 882년 청년 루트비히의 죽음을 계기로 882년 4월 23일 위그는 다시 군사를 일으켰지만 [[카를 3세 (동프랑크)|뚱보왕 카를]]이 보낸 군대에 의해 진압되고, 위그는 [[부르고뉴]]로 피신했다. 883년에는 대머리 카를의 시종인 엔겔람(Engilram)을 살해하고 그해에 그의 과부 프리데라다(Friderada)와 결혼했다. 이후 프리데라다는 재혼했지만 두번째 남편과 세번째 남편 역시 곧 사망하고, 네번째 남편인 힉베르트(Wicbert)도 재혼한지 얼마 안되어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