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베네딕토 1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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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년 브레시아에서 소집된 수도회 총회에서 니콜로 신부는 롬바르디아 관구장으로 선출되었다.<ref>Fietta, p. 236. Benedikt Maria Reichert (editor), ''Cronica ordinis praedicatorum ab anno 1170. usque ad 1333'' Part 1 (Rome 1897), pp. 102-104.</ref> 롬바르디아 관구장을 지내면서 니콜로 신부의 생활 방식은 크게 바뀌었다. 그는 한 곳에 오래 머무르기보다는 순시와 격려, 교정을 위해 여러 수도원을 두루 돌아다녔다. 그 당시 롬바르디아에는 51곳의 수도원이 있었다.<ref>Mortier, p. 323. 하지만 베르나르 기는 1303년 롬바르디아에는 33곳의 수도원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Jacobus Echard, ''Scriptores Ordinis Praedicatorum recensiti'' Tomus primus (Paris 1719), p. vii. 그 당시 니콜로는 남자 수도원 뿐만 아니라 여자 수도원(수녀원)도 관할하고 있었다.</ref> 또한 그는 이단심문관 역할도 수행했는데, 당시 교황들은 특히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가 이러한 책무를 수행하기에 적격이라고 여겼다.<ref>1289년 8월 26일 교황 니콜라오 4세는 롬바르디아와 제노바의 모든 도미니코회 이단심문관들에게 힘을 내서 이단에 대한 조사를 계속하라고 촉구하는 친서를 써서 보냈다. Augustus Potthast, ''Regesta pontificum Romanorum'' II, no. 23053.</ref> 또한 그에게는 관구 회의를 소집할 책무까지 있었다. 니콜로 신부는 3년 동안 롬바르디아 관구장으로 있으면서 1287년 베네치아, 1288년 리미니, 1289년 트리어에서 세 차례 관구 회의를 개최했다. 3년의 임기를 마친 후에 그는 트레비소에 있는 수도원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했지만, 1293년 브레시아 관구 회의에서 관구장의 연임이 결정됐다. 관구장을 연임한 니콜로 신부는 1294년 파벤티아, 1295년 베로나, 1296년 페라라에서 관구 회의를 개최했다. 그리고 1296년 스트라스부르에서 소집된 수도회 총회에서 [[도미니코회 총장|수도회 총장]]으로 선출되었다.<ref>Reichert, ''Cronica ordinis praedicatorum'', p. 104.</ref>
 
==추기경==
니콜로는 1298년 12월 4일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 의해 산타 사비나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됐다. 그는 1299년 3월 25일자로 로마 교황청에 들어가 추기경단에 포함되었다.
 
1300년 3월 2일 그는 오스티아의 [[주교급 추기경]]으로 승격되면서 주교품을 받았다. 1301년 5월 13일 그는 헝가리에 파견될 교황 사절로 임명됐다. 그는 1301년 6월 22일 공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나 1303년 5월 10일 귀국하였다.<ref>Eubel, p. 13, note 1.</ref> 또한 그는 프랑스에도 교황 사절로 파견되었다.
 
그는 회원들에게 자신의 전임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게 순종하게 하고 교황 사절로서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에 파견된 후 [[추기경]]이 되어 [[헝가리]]에 사절로 파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