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4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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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늙은 추기경이 [[1590년]] 사망하자, 로마 가톨릭교회 연맹은 궁여지책으로 죽은 앙리 3세의 큰 누이인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의 딸이자 [[펠리페 2세]]의 딸이기도 한 에스파냐의 공주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를 여왕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살리카 법]]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적국 에스파냐의 왕족을 새 왕으로 삼는다는 이러한 처사는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들 사이에서조차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결국 로마 가톨릭교회 당파는 점점 약해지는 명분과 넓어지는 앙리 4세의 세력에 밀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수도 파리가 꿋꿋하게 버티며 위그노인 앙리의 입성을 거부하자, 안 그래도 그에게 평생 강력한 영향을 끼쳤던 정부이자 가톨릭교도였던 [[가브리엘 데스트레]]에게 감화되어 있던 앙리는 [[1593년]] ''“파리는 (종교를 바꿔서라도개종해서라도) 가질미사를 거행할만한 가치가 충분하다있다(Paris vaut bien une messe)”''는 선언과 함께 앞으로 영원히 개신교를 버릴 것을 다짐하고 다시 한 번 로마 가톨릭교회로 종교를 바꾸었다. 이 사건은 유럽 내 개신교 신자들과 그때까지 그의 강력한 재정적 지원자 중 한 명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으나 이미 오랜 전쟁에 지쳐 있었던 파리 시민들을 비롯한 로마 가톨릭교회 연맹은 앙리 4세의 개종을 인정, 그를 왕으로 받아들임으로서 드디어 앙리 4세는 1594년 2월 27일 샤르트르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교회로 종교를 바꾼 뒤에도 그는 위그노들을 잊지 않고 개신교 신자에 대한 차별 금지법인 [[낭트 칙령]]을 반포함으로써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마침내 내전을 종식시켰다.
 
또한 위그노이자 나바라 국왕 시절부터 그를 보필한 [[쉴리 공작]] 막시밀리앙 드 베튄(''Maximilien de Bethune, duc de Sully'')을 전격적으로 재상으로 기용해 오랜 전쟁으로 파산 상태였던 프랑스의 재정을 크게 개선시켰을 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프랑스 사회를 발전시켰다. 지나치게 과중했던 농민들의 세 부담을 줄이는 대신 귀족들의 세 부담을 늘리고, 위그노들이 대부분이었던 프랑스의 상공업자들이 다시 생활 터전으로 돌아가면서 직물 산업, [[유리]] 공업 등이 다시 발전했다. 재무, [[농업]], 토지 관리에 있어서의 쉴리 공작의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도로망, 삼림, [[운하]] 건설과 [[캐나다]] [[퀘벡 주]] 개발 등이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앙리 4세의 유명한 말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나는 왕국의 모든 국민들로 하여금 일요일이면 닭고기를 먹게 하겠다(Si Dieu me prête vie, je ferai qu’il n’y aura point de laboureur en mon royaume qui n’ait les moyens d’avoir le dimanche une poule dans son pot! )”''는 현실이 되었다. 현대 프랑스에서 닭은 프랑스의 상징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