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상륙 작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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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 넘어옴|인천상륙작전}}
{{번역 확장 필요|en|Battle of Inchon}}
{{전쟁 정보
|분쟁 = 인천 상륙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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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는 1950년 6월 29일, 전쟁이 발발한지 4일 지난 뒤에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며 [[조선 인민군]]의 후방에 상륙, 병참선을 차단하고 낙동강을 통해 반격에 들어간다는 기본 전략을 세웠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미국 해군]]은 인천항의 간만의 차가 평균 7미터로, 항구에 상륙하기 전에 [[월미도]]를 먼저 점령해야 하는데다 선단의 접안지역이 좁아 상륙 후 시가전이 불가피한 점 등의 이유로 상륙 작전의 최악의 지형이라며 완강히 반대하였다. 해군의 일부 인사들이 작전 성공률이 5000대 1이라고 주장하며 격심하게 반대하였으나, 맥아더는 오히려 이런 난점이 적의 허점을 찌르는 기습이 될 수 있다며 인천 상륙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8월 28일 [[미국 합동 참모 본부]]로부터 승인을 얻었다.사실 인천 상륙 작전은 정말로 불가능에 가까운 작전이었다. 일단 조수간만의 차가 엄청나고, 또한 인천항을 지배하는 감제 고지인 월미도를 사전에 점령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대전에서 일본 본토 공격을 위해 태평양에서 '섬 건너뛰기 전술'로 큰 효과를 보았던 맥아더는 이번 상륙작전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이어 세계 전사에 남을 만한 승리를 가져올 것이라 확신했다.
 
== 개시사전 작전 ==
[[파일:Pre-invasion bombardment at Inchon.jpg|thumb|250px|right|상륙 이틀 전인 1950년 9월 13일 [[월미도]]를 사전 폭격하는 [[미국 해군|미 해군]]]]
상륙 작전은 동해에서 미군함 [[BB-63 USS 미주리|미주리호]]로 [[삼척시|삼척]] 근처에서 상륙 작전 준비로 오인시키기 위한 공습을 시작했고, 서해에서는 서해 최적의 상륙 지점으로 간주된 [[군산시]]에서도 상륙 작전과 비슷한 수준의 포격을 수차례 실시하는 등의 기만 작전으로 시작되었다. [[9월 4일]] 상륙 지점인 인천을 고립시키기 위한 공습이 시작되었으며, 상륙 당일인 [[9월 15일]]까지 지속되었다. 9월 15일에는 [[영덕군]]에 [[장사 상륙 작전]]이 실시되었다. 장사 상륙 작전에서 생존한 [[학도병]]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장사 상륙 작전이 9월 14일에 일어났다고 알고 있으나, 해군 기록에는 9월 15일에 장사 상륙 작전이 진행되었다고 적혀있다.<ref>{{웹 인용|url=https://www.youtube.com/watch?v=IN_mXBMUJQg|제목=[KFN스페셜] 비사(秘史), 1950년 9월 장사 상륙 작전|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 날짜=}}</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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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는 김일성에게 "인천을 조심하라"고 전문을 보내 서해안 방어 사령부를 신설하고 제18사단과 해군과 공군에서 차출한 육전대 병력 등으로 여러 방어용 신규 부대를 편성하는 한편 월미도에 해군 인원들로 구성된 방어진지를 만드는 등의 준비를 했으나 막을 수는 없었다.
 
== 상륙 작전의 진행 ==
9월 15일, 작전 개시일에 함정 206척, 7만여 명을 동원하여 [[영흥도]] 근처에 집결, 작전이 시작되었다.
작전의 제 1단계는 상륙 본대의 상륙 개시 직전에 수행하는 사전 정보 수집, 교란 작전, 각종 준비 작전 및 선견침투 작전이었다. 정보 수집 작전엔 해군 정보요원들의 엑스레이 작전, 교란 작전엔 위에도 언급된 학도병들의 장사 상륙 작전, 준비 작전과 선견 작전엔 미 해군 UDT의 수중 장애물 제거 작전과, [[KLO]] 부대원 및 한/미 해군/육군 장교들로 구성된 특별작전팀이 수행한 팔미도 등대 점등 작전이 대표적이다.
 
드디어 9월 15일, 작전 개시일에 함정 206척, 7만여 명을 동원하여 [[영흥도]] 근처에 집결집결하여, 작전이본격적인 상륙이 시작되었다.
== 진행 ==
작전의 제 1단계는 [[월미도]]의 점령으로 시작되었다. 새벽 5시에 시작된 공격 준비 사격에 이어 미 해병대의 제5연대 예하 제3대대가 전차 9대를 앞세우고 월미도 전면에 상륙하였다. 월미도는 2시간만에 완전히 미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미군은 부상 7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조선 인민군|인민군]]은 108명이 전사, 106명이 포로로 잡혔고, 네이팜탄 투하 및 기총소사로 민간인의 피해가 컸다.
 
작전의 제 1단계는2단계는 [[월미도]]의 점령으로 시작되었다. 새벽 5시에 시작된 공격 준비 사격에 이어 미 해병대의 제5연대 예하 제3대대가 전차 9대를 앞세우고 월미도 전면에 상륙하였다. 월미도는 2시간만에 완전히 미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미군은 부상 7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조선 인민군|인민군]]은 108명이 전사, 106명이 포로로 잡혔고, 네이팜탄 투하 및 기총소사로 민간인의 피해가 컸다.
제2단계는 [[제1해병사단 (미국)|미 해병대 제1사단]], [[제7보병사단 (미국)|미 육군 제7보병사단]], 그리고 [[대한민국 국군|국군]]의 해병대 제1연대와 육군 제17연대의 인천반도 공격으로 이어졌다. [[18 사단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인민군 제18사단]]과 인천의 경비 병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한미 연합군은 성공적으로 [[조선 인민군]]의 주력이 규합할 시간적 여유를 빼앗아버리며 [[인천]] 장악에 성공하였다.
 
제 3단계는 [[제1해병사단 (미국)|미 해병대 제1사단]]의 제1연대와 제5연대가 각각 인천 남동부의 블루 비취(Blue Beach)와 인천항의 레드 비취(Red Beach)에 상륙하여 장악하였다.
 
제 4단계는 미 해병대 1사단의 나머지 병력과 [[제7보병사단 (미국)|미 육군 제7보병사단]], 그리고 [[대한민국 국군|국군]]의 해병대 제1연대와 육군 제17연대의 상륙 및 인천 내륙 진격으로 이어졌다.
 
[[18 사단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인민군 제18사단]]에서 급조 편성한 인천의 허술한 북한 경비 병력은 거세게 밀려오는 연합군의 파상 공세에 대항할 의지를 잃어버리고 곧바로 붕괴되었다. 그리하여 연합군은 [[조선 인민군]]의 주력이 규합하여 대항할 시간적 여유를 빼앗아버리며 [[인천]] 장악에 쉽게 성공하였다.
 
인민군이 38선에서 낙동강 방어선까지 진격하는데 81일이 걸렸지만, 인천 상륙 이후 아군이 38선까지 돌아오는데 15일밖에 안 걸렸으니, 적의 배후를 기습한 이 작전의 성과는 매우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