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오딘지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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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오딘지엠'''({{vie|v=Ngô Ðình Diệm|hn=吳廷琰|eum=오정염}}, [[1901년]] [[1월 3일]] ~ [[1963년]] [[11월 2일]]) 또는 '''고 딘 디엠'''은 [[응우옌 왕조]]와 [[남베트남]]의 정치인이다. [[남베트남]]([[베트남 공화국]])의 초대 총통으로 [[1954년]] [[제네바 협정]] 이후 프랑스군이 철수하자 미국의 지원으로 수상이 되었고, [[1955년]] [[4월 30일]] [[베트남 공화국]] 국장 권한대행을 거쳐 같은 해 [[10월 26일]] [[베트남 공화국]] 초대 총통에 취임하였다. [[1953년]] [[9월]]에는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훈장 중장을 받았다.
 
안남왕국의 명문 출신으로 베트남의 프랑스 식민 시절 25세의 나이에 프랑스 식민 지방군의 대장을 맡았으며, 약 300여곳의 마을을 관리하는 고위 관료를 지낸 바 있기 때문에 베트남에선 민족 반역자로 분류된다. 그 후 황제 바오다이 밑에서 이부상서가 되었으나, 친(親)[[프랑스]]적인 정책에 반대하여 사임하였고, 이후 [[일본]]의 괴뢰화가 되자 제정에 대항하여 약소한 독립운동을 벌였다.<ref>Foner, Eric (1995). Free Soil, Free Labor, Free Men. New York. p. 4.</ref> [[1945년]] [[호찌민]](胡志明)의 공산군에 체포되었으며 [[호찌민]]으로부터 [[북베트남]]의 사회주의 정부에 입각,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출국, [[미국]], [[프랑스]], [[벨기에]]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하였다. 그 뒤 1954년 6월 귀국하여 미국의 지원으로 [[베트남국]]의 총리대신을수상을 지내다가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정]]을 선언, 1956년 국민투표로 공화국을 선포하고 대통령이총통이 되었다. 그러나 독재와 주변 측근 인사들의 부패 등으로 민심을 잃고, 여러 번의 군부 쿠데타를 겪었다.
 
[[1956년]] [[11월]]부터 독재 정치를 하였으며 또한 응오딘지엠 자신과 지주들이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였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교회]]를 옹호하고 [[불교]]를 탄압하였다. 이러한 억압정책에 맞서는 농민을 중심으로 한 게릴라 저항운동이 시작되었으며, [[1963년]] [[6월]]에는 [[불교]] 승려 [[틱꽝득]](Thich Quang Duc)의 분신 자살은 쿠데타의 도화선이 되었다. [[1963년]] [[11월]] [[즈엉반민]] 장군이 일으킨 [[1963년 남베트남 군사 쿠데타|군사 쿠데타]]에 의하여 정권은 무너지고 피습 후, 병원으로 이송 도중 아우 [[응오딘누]](Ngô Ðình Nhu, 呉廷柔)와 함께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