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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 ===
[[파일:Un & Bangja, Tokyo Asahi.jpg|thumb|200px|이은과 마사코의이방자의 혼약을 알리는 도쿄 아사히 신문 (1916년)]]
[[파일:Yi Un & Yi Bangja 1923.jpg|thumb|200px|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할 무렵의 이은과 마사코이방자 (1923년)]]
1907년 3월 12일에 영친왕부인에 대한 초간택이 이루어져<ref>{{웹 인용|저자=고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영친왕 부인에 대한 초간택을 하다|날짜=1907-03-12|url=http://sillok.history.go.kr/id/kza_14403012_002}}</ref> 재간택 대상자로 7인이 뽑혔으며, [[민영규]]의 손녀가 수망(首望)으로 뽑혔다.<ref>{{뉴스 인용|제목=간택수망|출판사=황성신문|날짜=1907-03-14|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HSS/HSS19070314u00_02.pdf}}</ref> 재간택자 명단에는 없었지만 [[여흥 민씨]] 일문의 위상을 고려하여<ref>{{뉴스 인용|제목=경술국치 100년… “고종은 독살되지 않았다”|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15&aid=0002346226|출판사=한국경제|날짜=2010-12-02|저자=전장석}}</ref> [[민영돈]]의 딸 [[민갑완]]이 황태자비로 선발되었다. 이은이 일본 유학을 떠난 이후 약혼반지를 전달 받았으나 결국 파혼을 당하고 [[상하이]]로 망명을 떠나 평생 수절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오백년 이조왕실 최후의 계승자 이은세자와 약혼했던 규수|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806290020910500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8-06-29&officeId=00020&pageNo=5&printNo=11042&publishType=00010|출판사=동아일보|저자=이강현|날짜=1958-06-29}}</ref>
 
1916년 8월 3일에 조선과 일본의 각 신문에 이은과 일본 황족 [[이방자|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 이방자)의 약혼 기사가 실렸다. 이 결혼은 한일 병합 이전부터 이토 히로부미에 의하여 계획되어 이완용과 합의까지 된 사항이었고,<ref>{{서적 인용|저자=한명근|제목=한말 한일병합론 연구|연도=2002|출판사=국학자료원|쪽=53}}</ref> 병합 이후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궁내대신 [[하타노 요시나오]]의 협의에 의해 결정된 것이 언론에 발표된 것이다.<ref>{{서적 인용|저자=坂元眞一|제목=조선왕실 자손들과 그 대한민국 국적 - 왕공족의 법적신분과 그 등록을 중심으로|연도=1999|기타=서울국제법연구 6|쪽=175}}</ref>
 
당시 [[일본 황실]]의 제도와 구성에 대해 정하는 법률인 《[[황실전범]]》(皇室典範)의 제39조에 의하면 “황족의 결혼은 동족 또는 칙지에 따라 특별히 인정된 화족에 의한다.”고 규정되어 있어 일본 황족과 조선 왕족의 결혼은 불가능하였고, 이은과 마사코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황실전범》의 개정이 필요하였다. 결국 1918년 11월 28일에 “황족 여자는 왕족 또는 공족에게 시집갈 수 있다.”는 《황실전범증보》(皇室典範增補)가 제정되었다.<ref>{{서적 인용|저자=스즈키 마사유키|제목=근대 일본의 천황제|연도=1998|출판사=이산|쪽=114 ~ 115|id=ISBN 8987608050}}</ref>
 
1918년 12월 5일에 혼인을 인정하는 [[다이쇼 천황]]의 칙허가 발표되었다.<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세자의 가례를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왕의 딸 방자여왕으로 정하다|날짜=1918-12-05|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1112005_001}}</ref> 같은 해 12월 8일에 약혼을 의미하는 납채의식이 행해졌고, 12월 11일에는 이은의 저택에서 약혼자와의 첫 대면이 있었다.<ref>{{뉴스 인용|제목=세월이여 왕조여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회고록 (5) 결혼 준비|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5190032920300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5-19&officeId=00032&pageNo=3&printNo=11889&publishType=00020|출판사=경향신문|저자=이방자|날짜=1984-05-19}}</ref> 결혼식은 1919년 1월 25일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1월 21일에 고종이 승하하자 연기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세월이여 왕조여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회고록 (7) 고종 승하|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5230032920900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5-23&officeId=00032&pageNo=9&printNo=11892&publishType=00020|출판사=경향신문|저자=이방자|날짜=1984-05-23}}</ref> 고종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하여 이은은 1919년 1월 24일에 귀국하였다가<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세자가 동경에 돌아와 상복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풀다|날짜=1919-01-24|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1201024_001}}</ref> 3월 10일에 일본으로 돌아갔다.<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세자가 동경의 별저로 돌아가다|날짜=1919-03-10|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1203010_002}}</ref> 1920년 4월 27일에 중위로 진급하였고,<ref name="중위">{{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세자가 육군 보병 중위에 임명되고 대훈위에 서임되어 국화 대수 훈장을 받다|날짜=1920-04-27|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1304027_003}}</ref> 4월 28일에 도쿄 이은의 저택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세자가 토쿄 가스미가세키이궁에서 친영례과 합근식을 거행하다|날짜=1920-04-28|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1304028_002}}</ref> 결혼식 당일에 마사코가이방자가 타고 있던 마차로 유학생 서상일(徐相日)이 사제폭탄을 던졌으나 터지지 않았고,<ref>{{뉴스 인용|제목=세월이여 왕조여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회고록 (12) 신혼 생활|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6040032920900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6-04&officeId=00032&pageNo=9&printNo=11902&publishType=00020|출판사=경향신문|저자=이방자|날짜=1984-06-04}}</ref>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는 이은의 결혼을 ‘[[내선일체]]’(內鮮一體)의 표본으로 선전하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ref>{{서적 인용|저자=조선총독부|제목=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유고|연도=1920-4-28|기타=조선총독부 관보 호외}}</ref>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독립신문》은 이은을 원수의 여자와 결혼한 금수(禽獸)이며 적자(賊子)라고 비난하였다.<ref>{{뉴스 인용|출판사=독립신문||날짜=1920-05-08|url=http://search.i815.or.kr/OrgData/OrgList.jsp?tid=ns&id=DR192005080101|제목=최후의 정죄 (은의 취구녀)}}</ref>
 
1920년 12월 9일에 [[일본 육군대학교]]에 제35기생으로 입학하였다.<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세자가 육군 대학교에 입학하다|날짜=1920-12-09|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1312009_002}}</ref> 고종의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1921년 1월 26일에 귀국하였다가<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세자가 도쿄에서 와서 양전을 배알하고 효덕전에 나가다|날짜=1921-01-26|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1401026_002}}</ref> 1월 29일에 일본으로 돌아갔다.<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세자가 효덕전에 나가 전알하고 도쿄 별저에 가다|날짜=1921-01-29|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1401029_001}}</ref> 같은 해 8월 18일에 장남 [[이진 (황족)|이진]](李晉)이 태어났다.<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손이 탄생하다|날짜=1921-08-18|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1408018_001}}</ref><ref>{{뉴스 인용|제목=세월이여 왕조여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회고록 (15) 장남 진 탄생|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61100329209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6-11&officeId=00032&pageNo=9&printNo=11908&publishType=00020|출판사=경향신문|저자=이방자|날짜=1984-06-11}}</ref> 1922년 4월 26일에 이은과 마사코는이방자는 장남과 함께 귀국하였는데<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세자, 왕세자비, 왕손이 동경에서 돌아와 석조전에 입궐하다|날짜=1922-04-26|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1504026_001}}</ref>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날인 5월 7일에 이진이 발병하여<ref>{{뉴스 인용|제목=세월이여 왕조여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회고록 (18) 조선식 혼례|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61800329209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6-18&officeId=00032&pageNo=9&printNo=11914&publishType=00020|출판사=경향신문|저자=이방자|날짜=1984-06-18}}</ref><ref>{{뉴스 인용|제목=세월이여 왕조여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회고록 (19) 진 왕자의 죽음|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6200032920901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6-20&officeId=00032&pageNo=9&printNo=11916&publishType=00020|출판사=경향신문|저자=이방자|날짜=1984-06-20}}</ref> 5월 11일에 덕수궁 [[석조전]]에서 돌연 사망하였다.<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손 이진이 석조전에서 죽다|날짜=1922-05-11|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1505011_001}}</ref> 5월 17일에 이진의 유해를 순헌황귀비 엄씨의 묘인 [[영휘원]](永徽園) 옆에 장사지내고,<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미시에 왕손을 숭인원에 장사지내다|날짜=1922-05-17|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1505017_003}}</ref> 원호는 [[숭인원]](崇仁園)으로 정하였으며,<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손 원호를 숭인으로 정하다|날짜=1922-05-15|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1505015_001}}</ref> 이은과 마사코는이방자는 5월 18일에 일본으로 돌아갔다.<ref>{{뉴스 인용|제목=세월이여 왕조여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회고록 (22) 관동 대지진|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62700329209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6-27&officeId=00032&pageNo=9&printNo=11922&publishType=00020|출판사=경향신문|저자=이방자|날짜=1984-06-27}}</ref><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세자와 왕세자비가 동경의 별저로 돌아가다|날짜=1922-05-18|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1505018_001}}</ref> 그 후 마사코는이방자는 1923년과 1930년에 임신을 하지만 유산하였고,<ref name="발병">{{뉴스 인용|제목=세월이여 왕조여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회고록 (39) 덕혜옹주의 발병|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8100032920501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8-10&officeId=00032&pageNo=5&printNo=11960&publishType=00020|출판사=경향신문|저자=이방자|날짜=1984-08-10}}</ref> 1931년 12월 29일에 차남 [[이구 (1931년)|이구]](李玖)를 낳았다.<ref>{{뉴스 인용|제목=세월이여 왕조여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회고록 (40) 구의 출생|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81300329205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8-13&officeId=00032&pageNo=5&printNo=11962&publishType=00020|출판사=경향신문|저자=이방자|날짜=1984-08-13}}</ref>
 
=== 이왕가 계승과 즉위 ===
[[파일:Crown Prince of Korea Yi Un in Port of Kobe 1928.jpg|thumb|200px|left|고베항에 이은 부부를 마중 나온 왕실 가족들 (1928년 4월 9일)]]
[[파일:Prince Yi Wu 09.jpg
|thumb|200px|left|이은과이은, 이건, 이우 (1938년)]]
1923년 7월 6일에 대위로 진급하였으며,<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세자가 대위로 승진하다|날짜=1923-07-06|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1607006_001}}</ref> 같은 해 11월 29일에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근위 보병 제2연대 제1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세자가 육군 대학을 졸업하고 근위 제2연대 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고 전보로 알려오다|날짜=1923-11-29|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1611029_001}}</ref> 같은 해 12월 30일에 [[종묘]]에 졸업 보고를 하고 순종에게 신년 하례를 하기 위해서 이은과 마사코는이방자는 귀국하였다가<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세자 부부가 돌아와 창덕궁을 알현하고 석조전에서 종척, 귀족 이하의 알현을 받다|날짜=1923-12-30|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1612030_001}}</ref><ref>{{뉴스 인용|제목=세월이여 왕조여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회고록 (24) 숭인원을 찾다|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7020032920900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7-02&officeId=00032&pageNo=9&printNo=11926&publishType=00020|출판사=경향신문|저자=이방자|날짜=1984-07-02}}</ref> 1924년 1월 4일에 일본으로 돌아갔다.<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세자 부부가 동경 별저로 가다|날짜=1924-01-04|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1701004_001}}</ref> 같은 해 12월 20일에 참모본부 소속으로 전보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이왕세자 전하 어도영|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241222u00_02.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24-12-22}}</ref>
 
순종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은과 마사코는이방자는 [[덕혜옹주]]와 함께 1926년 3월 3일에 귀국하여 순종을 문안하였으며,<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세자 부부가 구주를 유람할 것을 청하다|날짜=1926-03-03|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1903003_001}}</ref><ref>{{뉴스 인용|제목=세월이여 왕조여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회고록 (28) 순종황제 승하|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7110032920900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7-11&officeId=00032&pageNo=9&printNo=11934&publishType=00020|출판사=경향신문|저자=이방자|날짜=1984-07-11}}</ref> 3월 11일에 일본으로 귀국하였다.<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세자 부부와 덕혜 옹주가 동경으로 돌아가다|날짜=1926-03-11|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1903011_001}}</ref> 순종의 병세가 다시 악화되었다는 연락을 받아 4월 8일에 이은과 마사코는 덕혜옹주와 함께 재차 귀국하였다.<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세자 부부와 덕혜 옹주가 창덕궁의 환후가 심하다는 것을 전달받고 돌아오다|날짜=1926-04-08|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1904008_002}}</ref> 결국 4월 25일에 순종이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였고,<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묘시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돌아가시다|날짜=1926-04-25|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1904025_001}}</ref> [[4월 26일]]에 왕세자 이은을 ‘창덕궁 이왕 은 전하’로 칭한다는 다이쇼 천황의 칙령에 따라 왕위를 계승하였다.<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궁내부 대신이 왕세자 은전하의 칭호를 창덕궁 이왕 은전하로 제정하였다는 칙령을 받다|날짜=1926-04-26|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1904026_005}}</ref> 6월 3일에 이은이 조선군사령부에서 겸무하도록 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이왕전하 조선군 어겸근|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260604u00_03.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26-06-04}}</ref> 순종의 장례가 끝난 후 6월 26일에 이은과 마사코는이방자는 일본으로 돌아갔다.<ref>{{뉴스 인용|제목=세월이여 왕조여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회고록 (30) 6. 10 만세 사건|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7180032920900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7-18&officeId=00032&pageNo=9&printNo=11940&publishType=00020|출판사=경향신문|저자=이방자|날짜=1984-07-18}}</ref> 1927년 4월 10일에 순종의 제사를 위하여 이은과 마사코는이방자는 덕혜옹주와 함께 귀국하였다가<ref>{{뉴스 인용|제목=이왕전하 어입성|날짜=1927-04-12|출판사=매일신보|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270412u00_01.pdf}}</ref> 남부 지방을 시찰하고 4월 23일에 일본으로 돌아갔다.<ref>{{뉴스 인용|제목=이왕전하 남조선어순유|날짜=1927-04-24|출판사=매일신보|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270424u00_02.pdf}}</ref>
 
1927년 5월 24일에 이은과 마사코는이방자는 [[요코하마 항]]에서 하코네마루(箱根丸)에 승선하여 유럽 여행을 떠났다.<ref>{{뉴스 인용|제목=세월이여 왕조여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회고록 (31) 유럽 여행 출발|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72000329209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7-20&officeId=00032&pageNo=9&printNo=11942&publishType=00020|출판사=경향신문|저자=이방자|날짜=1984-07-20}}</ref> 일본 정부는 국제적으로 조선에 아직도 독립된 왕실이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을 우려하여 이은 부부를 백작 부부로 위장하도록 하였다.<ref name="여행">{{뉴스 인용|제목=세월이여 왕조여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회고록 (35) 자유로운 여행|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8010032920501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8-01&officeId=00032&pageNo=5&printNo=11952&publishType=00020|출판사=경향신문|저자=이방자|날짜=1984-08-01}}</ref>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이은이 중국 상하이에 들르는 것을 기회로 삼아 납치할 계획을 세우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세월이여 왕조여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회고록 (32) 상근환 선상|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72300329209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7-23&officeId=00032&pageNo=9&printNo=11944&publishType=00020|출판사=경향신문|저자=이방자|날짜=1984-07-23}}</ref>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를 거쳐 인도양을 건너 [[이집트]]에 들린 다음 7월 4일에 [[프랑스]] [[마르세유]]에 도착하였다. 프랑스 대통령 [[가스통 두메르그]], [[영국]]의 [[영국의 조지 5세|조지 5세]], [[네덜란드]]의 [[빌헬미나]] 여왕, [[교황 비오 11세]],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스웨덴]] 왕세자 [[구스타프 6세 아돌프|구스타프 아돌프]], [[독일]]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 등을 차례로 예방하였다.<ref name="여행"/><ref>{{뉴스 인용|제목=세월이여 왕조여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회고록 (36) 용기를 준 사람들|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80300329206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8-03&officeId=00032&pageNo=6&printNo=11954&publishType=00020|출판사=경향신문|저자=이방자|날짜=1984-08-03}}</ref> 1928년 3월 3일에 [[모나코]]에서 배를 타고, 4월 9일에 일본 [[고베 항]]에 도착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세월이여 왕조여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회고록 (38) 약상자 속의 건백서|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80800329209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8-08&officeId=00032&pageNo=9&printNo=11958&publishType=00020|출판사=경향신문|저자=이방자|날짜=1984-08-08}}</ref>
 
1928년 2월에 이은의 도쿄 저택을 신축하는 공사가 시작되었고, 1930년 3월부터 새 저택에서 거주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이왕전하 신어전|출판사=매일신보|날짜=1929-03-15|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290315u00_02.pdf}}</ref> 1911년에 메이지 천황이 이은에게 선물한 아자부 도리이자카의 저택을 [[궁내성]]에 반환하는 대신에 궁내성에서 [[아카사카 (도쿄 도)|아카사카]](赤坂)의 기타시라카와(北白川) 궁 자리에 건물을 신축하여 증여한 것이다.<ref name="발병"/><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천황이 왕세자에게 저택과 수레, 말을 하사하다|날짜=1911-02-01|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0402001_004}}</ref><ref name="냉대"/> 궁내성 내장료 과장 기타무라 고죠(北村耕造)와 기사 곤도 요키치(權藤要吉)가 설계하였고, 시미즈쿠미(淸水組)가 시공하였다.<ref name="ReferenceA">{{서적 인용|제목=皇室の邸宅|저자=鈴木博之|출판사=JTBパブリッシング|연도=2006|쪽=40}}</ref>
 
[[파일:Yi Un & Yi Bangja at the National Art Exhibition.jpg|thumb|200px|제국미술원전람회 조각진열장을 둘러보는 이은과 마사코이방자 (1933)]]
참모본부 부원 겸 조선군사령부 소속으로 있다가<ref>{{뉴스 인용|제목=이왕전하 소좌로 진급|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280716u00_02.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28-07-16}}</ref> 1928년 8월 11일에 소좌로 진급하여 근위 보병 제2연대 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이왕전하 어영진 육군소좌로 근위대 대장 인정전에서 수하|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280812u00_02.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28-08-12}}</ref> 1929년 8월에 제1사단 관할 보병 제1연대 소속으로 전보되었으며,<ref>{{뉴스 인용|출판사=매일신보|날짜=1929-08-03|제목=이왕전하 전보 보병 제1연대부로|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290803u00_01.pdf}}</ref> 1930년 12월 22일에 교육총감부로 전임되었다.<ref>{{뉴스 인용|출판사=매일신보|날짜=1930-12-23|제목=이왕전하 전임 교육총감부에 출임|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01223y00_01.pdf}}</ref> 1932년 6월 24일에 중좌로 진급하였고,<ref>{{뉴스 인용|제목=육군보병중좌로 이왕전하 어승진|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20626y00_02.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32-06-26}}</ref> 1933년 4월에 교육총감부 과원으로 보임되었으며,<ref name="항공"/> 1935년 7월 22일에 대좌로 진급되면서 우츠노미야(宇都宮) 보병 제59연대 연대장에 임명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황왕족 3전하 지방부대 어전보 이왕전하 대좌로|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50723v00_02.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35-07-23}}</ref> 1936년에 육군의 [[황도파]] 청년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킨 [[2·26 사건]]이 발생하자 이은은 진압 명령을 받아 제59연대 병력을 이끌고 도쿄로 갔다가 반란 부대가 해산하면서 원대로 복귀하였다.<ref>{{서적 인용|저자=김을한|제목=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연도=2010-08-15|출판사=페이퍼로드|쪽=140 ~ 142|id=ISBN 8992920458}}</ref> 1937년 3월에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8월에 육군사관학교 예과 교수부장에 임명되었다.<ref name="항공"/> 1938년 2월에 북지나방면군사령부 소속으로 전임되었고,<ref name="항공"/> 같은 해 7월 15일에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육군소장으로 이왕전하 어진급|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80716y00_02.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38-07-16}}</ref> 1939년 8월에 근위 보병 제2여단장에 임명되었다가 1940년 8월에 오사카 제4사단장에 임명되었으며,<ref name="항공"/> 같은 해 12월 2일에 육군 중장으로 진급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육군정기대이동|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401203y00_01.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40-12-03}}</ref> 1941년 7월에 제51사단장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11월 6일에 교육총감부 소속으로 전임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이왕은전하 어영전 교육총감부로|출판사=매일신보|날짜=1941-11-07|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411107y00_01.pdf}}</ref> 1942년 8월 1일에 제1항공군사령부에 소속되어<ref>{{뉴스 인용|제목=이왕은전하 어전보 항공군사령부부에|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420802y00_01.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42-08-02}}</ref> 1943년 7월 20일에 제1항공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가<ref name="항공">{{뉴스 인용|제목=이왕전하 어친보 항공군사령관에|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430721y00_01.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43-07-21}}</ref> 1945년 4월 1일에 군사참의관으로 전임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군사참의관에 이왕전하 어영전|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450403v00_01.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45-04-03}}</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