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인지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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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은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에 처음 지어졌다. [[1453년]]([[조선 단종|단종]] 1년)과 [[1869년]]([[대한제국 고종|고종]] 6년)에 고쳐지었다. 본래 흥인지문은 [[동대문구]]에 속했고 구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되었으나, 수차례 행정구역이 조정되면서 지금은 [[종로구]]의 관할에 속하게 되었다.
 
== 역사 ==
웅녀 빵댕이
흥인지문은 일대의 지반이 낮아 땅을 돋운 뒤 건설하여야 해서 [[1396년]]([[조선 태조|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을 건립할 때에도 공사중이었으며<ref>《태조실록》 10권 5년 9월 24일, 성 쌓는 일이 끝나자 인부들을 돌려 보내다. 각 문의 이름.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509024_002 국사편찬위원회], [[:s:태조강헌대왕실록/5년#9월24일 2번째 기사|위키문헌]]</ref>, [[1398년]](태조 7년)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이 때의 이름은 '''흥인문'''(興仁門)이었다. [[1451년]]([[조선 문종|문종]] 1년) 3월에는 도성을 고쳐 쌓은 뒤 기한이 남아, 흥인지문을 혜화문과 더불어 수리하였다.<ref>《문종실록》 6권 1년 3월 17일, 당령 선군과 방패·섭육십을 징용하여 도성을 수축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03017_009 국사편찬위원회]</ref> 같은 해 10월에 본격적인 흥인지문 정비를 시작하여<ref>《문종실록》 10권 1년 10월 1일, 좌의정 황보인에게 흥인문의 역사를 감독하게 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10001_004 국사편찬위원회]</ref>, [[1453년]]([[조선 단종|단종]] 1년) 5월에 완료하였다.<ref>《단종실록》 6권 1년 5월 5일, 이명민을 불러서 창덕궁·인정전과 흥인문·수문의 역사를 끝마치게 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05005_001 국사편찬위원회]</ref>
 
[[1724년]]([[조선 영조|영조]] 즉위년)에는 발인 때 [[상여]]가 나가기가 쉽게 하기 위하여, [[국장도감]]에서 건의한 대로 흥인지문의 박석을 파내려갔다.<ref>《영조실록》 2권 즉위년 11월 25일, 국장 도감에서 발인 습의 때 대여의 높이에 부족한 흥인문을 고치기를 청하자 그대로 따르라. [http://sillok.history.go.kr/id/kua_10011025_003 국사편찬위원회]</ref> [[1868년]]([[조선 고종|고종]] 5년)에는 흥인지문이 크게 손상되었기에 [[의정부]]에서 그 수리를 요청하였다.<ref>​《고종실록》 5권 5년 9월 7일, 중추부 등 아문을 중건하고 성문을 수리하도록 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za_10509007_001 국사편찬위원회]</ref> 이듬해 3월에 중수를 끝냈다.<ref>《고종실록》 6권 6년 3월 16일, 흥인문 공사가 끝났으나 물길이 막혀 따로 수문 한 곳을 뚫다. [http://sillok.history.go.kr/id/kza_10603016_001 국사편찬위원회]</ref> 이 즈음 [[풍수지리]]에 따라 한양 동쪽의 지기가 약하다고 하여 그 [[기 (철학)|기운]]을 북돋기 위해 넉 자로 이름을 고쳤다고 전해진다.
 
[[1907년]](고종 44년) 3월에는 흥인지문과 [[숭례문]]의 좌우측 성벽을 8칸씩 헐어 [[서울전차|전차]] 선로를 부설하였다.<ref>《고종실록》 48권 44년 3월 30일, 동, 남 두 대문의 좌우 성첩을 각각 8간씩 헐어 버리다. [http://sillok.history.go.kr/id/kza_14403030_001 국사편찬위원회]</ref> [[조선총독부]]에 의해 보물 1호로 지정되었는데, 이것이 흥인지문을 숭례문과 함께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지나간 역사적 의미가 있는 상징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2&aid=0000031196 “숭례문 일제 때 파괴될 뻔 했다”], 《경향신문》, 2003.09.02.</ref>
 
[[1999년]]에는 옹성이 붕괴되어 8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3억여원을 들여 보수하였으나, 옹성 아랫부분이 튀어나오는 '배부름 현상'이 일어나 재시공을 결정하였다.<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001&aid=0000041680 보물 1호 흥인지문 부실 복원], 《연합뉴스》, 2000.12.09.</ref> [[수도권 전철 4호선|지하철]]이 개통된 이후 [[지하수]]위가 낮아지고 [[지반]]이 침하되었으며<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0011756 동대문 균열 가속화 주변 지반침하 심각], 《경향신문》, 2003.03.26.</ref>, [[2002년]] [[12월]]부터 [[2007년]] [[8월]]까지 옹성을 해체하여 지반 보강 후 복원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5&aid=0000285423 흥인지문 원형 찾았다… 서북옹성 5년 8개월만에 복원 끝내], 《국민일보》, 2007.08.02.</ref> [[2015년]]에는 문 북쪽의 도성과 연계하여 석재를 포장하는 과정이 진행되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0181118101&code=620101 “한양도성 안으로 진입합니다” 끊어진 서울의 도성 흔적 되살린다], 《경향신문》, 2015.10.18.</ref>
 
== 건축적 특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