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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보
| 이름 = 김억
| 필명 = 김포몽
| 출생일 = [[1896년]] [[11월 30일]]
| 출생지 = [[평안북도]] [[곽산군]]
[[1916년]] 모교인 오산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였다. 〈진달래꽃〉의 시인 [[김소월]]은 오산학교에서의 제자로, 김억의 지도를 받았다. [[1922년]] 김소월을 처음 문단에 소개한 사람도 스승 김억이다.
 
낭만주의 성향의 《[[폐허]]》와 《[[창조 (잡지)|창조]]》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평양]]의 [[숭실학교]] 교사를 지냈고,지냈다. 이밖에도 [[에스페란토]] 보급에 앞장서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24년에는 《[[동아일보]]》에 학예부 기자로 입사했다.
 
김억은 당시까지 낯설었던 해외 문학 이론을 처음 소개함과 동시에 개인의 정감을 자유롭게 노래하는 한국 자유시의 지평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된다. 서구의 상징시를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하여 1920년대 초반 상징시풍이 문단에 정착하는 계기를 열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는 한시의 번역이나 민요 발굴 등 전통적인 정서에 대한 관심으로 방향을 돌렸다.
 
[[1930년대]] 말에는 '''김포몽'''(金浦夢)이라는 예명으로 대중가요 작사 활동도 벌였다. 작사가가 된 것은 생활고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생소한 예명을 사용한 이유는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서 문단에서의 지위가 남달랐기 때문으로 추정된다.<ref>{{서적 인용
|저자=강옥희,이영미,이순진,이승희
|제목=식민지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발행일자=2006-12-15
|출판사=소도
|출판위치=서울
|id=ISBN 9788990626264
|페이지=49쪽
|꺾쇠표=예
}}</ref> 작사한 노래 가운데 [[선우일선]]의 〈꽃을 잡고〉는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제2차 세계 대전]] 중 전사한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의 〈아아 야마모토 원수〉(1943) 등 친일 시를 발표했다. 친일 저작물 수는 시 4편을 포함하여 총 6편이 밝혀져 있다.<ref>{{저널 인용
|url=http://www.artnstudy.com/zineasf/Nowart/penitence/lecture/03.htm
|꺾쇠표=예
}}</ref> [[국민총력조선연맹]]과 [[조선문인협회]], [[조선문인보국회]] 간부를 지내기도 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선정되었다.
 
[[한국 전쟁]] 때 납북되었고, [[북조선]]으로 간 유력 인사들이 [[1956년]] [[평양]]에서 결성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을 지낸 뒤로 행적이 불분명하다. [[1958년]] 평북 [[철산군]]의 협동농장으로 강제 이주되었다는 설이 있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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