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트리다테스 6세 메가스: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Choboty (토론 | 기여)
잔글 영어판 분류 정보를 이용.+분류:기원전 1세기 이란 사람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틀 이름 및 스타일 정리
2번째 줄:
[[파일:Mithridates VI of Pontus.jpg|right|thumb|200px|[[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의 초상이 새겨진 은화.]]
 
'''미트리다테스 6세'''({{llang|el|Μιθριδάτης}}, [[기원전 132년]] - [[기원전 63년]])는 '''미트리다테스 대왕'''으로 알려져 있는 [[아나톨리아]] 북부의 [[폰투스|폰투스 왕국]]의 왕이다. [[로마 공화정]] 말기 세명의 유명한 로마 장군([[술라]], [[루쿨루스]], [[폼페이우스]])과 차례로 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 초기 ==
미트리다테스 6세는 [[폰투스]]의 왕, 미트리다테스 5세의 아들로 [[기원전 120년]]경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 게스파이피리스가 왕국을 통치했다. [[기원전 115년]] 그는 어머니로부터 왕위를 빼앗고 왕위에 방해되는 수많은 형제들을 죽인후 통치를 확고히 하였다. 당시 [[아나톨리아]]의 폰투스 영토는 미트리다테스 5세가 죽은 뒤 크게 줄어들어 있었는데 파플라고니아가 독립했고 [[기원전 116년]] [[프리기아]]는 [[로마 공화정]]의 아시아 속주에 통합되었다.
 
야심찬 미트리다테스는 [[흑해]] 연안에서 폰투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로 결심하고 [[크리미아]]과 [[콜키스]]를 폰투스에 합병했다. 그 지역에 사는 그리스인들에게는 [[스키타이]]로부터 지켜준다는 명목으로 충성을 약속 받았다. 미트리다테스는 [[파플라고니아]]와 [[갈라티아]]를 분리하여 [[비티니아]] 왕 [[니코메데스 3세]]와 나누어 가지는 데 성공하고 다시 [[카파도키아]]를 놓고는 비티니아와 전쟁을 벌였다. [[기원전 95년]]과 [[기원전 92년]] 로마는 니코메데스와의 동맹을 구실로 두 차례에 걸쳐 개입하였다.
19번째 줄:
 
===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기원전 75년]] - [[기원전 65년|65년]]) ===
미트리다테스와 로마는 끈임없이 크고 작은 반목을 계속하다가 [[기원전 75년]]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미트리다테스는 칼케돈에서 [[집정관]] 마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를 패배시켰으나, 뒤이어 투입된 [[루쿨루스]]에 의해 계속해서 패했다. 그는 [[기원전 73년]]에 키지쿠스 바깥으로 쫓겨났고 루쿠룰스에 의해 추격당해 동맹국인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2세에게 도망쳤다. 루쿨루스는 티그라노케르타, 아르타크사타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아르메니아 깊숙이까지 추격하였으나 그 뒤 부대 내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궁지에 빠졌다.
 
[[기원전 66년]] 로마는 루쿨루스를 소환하고 대신 폼페이우스를 투입하였고 폼페이우스는 미트리다테스와 티그라네스 2세의 아르메니아를 모두 완패시켰다. 폼페이우스는 사실상 2년 만에 전투를 완결하고 소아시아를 완전한 로마의 영향력 아래 두는 데 성공했다.
 
== 죽음과 그이후 ==
미트리다테스는 병력과 권력을 모두 잃고 계속 퇴각하였고 [[기원전 64년]] 킴메리 보스포루스 반도에 있는 판티카파이움에서 병력을 모아 로마에 반격을 시도하려 했으나 아들인 [[파르나케스 2세]]의 반란군에 의해 배반당하고 도망쳤다. 절망에 빠진 미트리다테스는 독약을 먹고 자살하려다 실패하고 부하에게 자신을 죽이도록 명령했다.
 
그의 시체는 폼페이우스에게 보내졌고, 폼페이우스는 그를 폰투스의 수도 시노페의 왕실묘지에 매장했다.
 
{{헬레니즘 군주}}
{{Authority전거 control통제}}
 
[[분류:폰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