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키아누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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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마르키아누스는 [[트라키아]] 출신으로 [[로마 군단]]에서 복무하였다. [[사산조 페르시아]]와 [[반달족]]과의 전투에 참전했으며 [[431년]] [[북아프리카]]의 [[히포 레기우스]] 근처에서 반달족과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고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에게 다시는 반달족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나서야 풀려났다.
 
그 뒤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가 [[450년]] [[테오도시우스 2세]]가 죽자 황제의 누나인 [[풀케리아]]와 결혼하고 동로마의 황제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풀케리아는 이미 독신 서약을 한 몸이었으므로 마르키아누스는 단지 형식적인 남편일 뿐이었다.
 
마르키아누스가 황제가 된 이후 처음으로 한 일은 전임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훈족]]의 [[아틸라]]에게 바치기로 한 연례공물을 폐지한 일이었다. 당시 훈족은 [[서로마 제국]]의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물을 폐지한 동로마 제국에게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못했다. 이 시도는 성공적이어서 그의 치세 동안 동로마 제국은 국고를 튼튼히 할 수 있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서로마 제국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정책으로 일관하여 서로마가 아틸라의 침공을 받을 때에도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마르키아누스는 당시 동로마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인 [[이단]] 논쟁에 휩싸였다. 그리스도 [[단성론]]을 둘러싸고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대한 논란으로 사회가 어수선해지자 마르키아누스는 [[451년]] 10월 [[칼케돈 공의회]]를 열고 논란을 종식시키려고 하였다. 칼케돈 공의회에서는 비록 단성론을 이단으로 규정했지만 [[시리아]]나 [[이집트]]의 [[주교]]들은 그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단일한 본성을 계속 주장하여 향후 비잔티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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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자=[[테오도시우스 2세]]<br />(재위 408 - 450)
|후임자=[[레오 1세 (비잔티움 제국)|레오 1세]]<br />(재위 457 - 474)
|임기=[[450년]] - [[457년]]
|직책=[[비잔티움 황제 연대표|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
{{로마황제}}
{{Authority전거 control통제}}
 
[[분류:396년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