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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그의 폐위와 [[고려 우왕|우왕]], 창왕 신씨설을 동조한 인물 중에는 [[정몽주]]도 있었다. [[정몽주]]는 [[1392년]]의 [[고려]] 멸망과 역성혁명에는 반대하였으나 [[조선 태조|이성계]], [[정도전]], [[조준]] 등이 [[고려 우왕|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폐위하는 데 가담하였다. [[조선 태조|이성계]] 일파의 주장은 고려사, [[고려사절요]]에도 등재되어 신우, 신창으로 등재되었으나 근거없는 낭설로 확인된다. 이는 그가 주장한 일편단심이나 [[성리학]]적 충효 사상과도 모순된다.
 
[[조선 태조|이성계]]는 [[정몽주]] 등과 이른바 폐가입진[(廢假入眞]), 즉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는 논리로 창왕을 폐위시키고, 제20대 왕인 신종의 7세손 [[고려 공양왕|정창군 요]]를 등극시킨다.<ref>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닷컴, 2004) 24페이지</ref>
 
[[고려 우왕|우왕]] 복위 사건은 주모자로 거론된 사람과 처리 과정 등을 볼 때 다소 의문이 남기는 하지만, 정몽주는 [[조선 태조|이성계]]와 뜻을 같이하여 [[고려 공양왕|공양왕]]을 세운 것은 물론이고, '폐가입진(廢假立眞)'을 내세우면서 [[고려 우왕|우왕]]과 창왕을 왕씨가 아닌 [[신돈]]의 후손으로 모는 작업에도 동참하였다.<ref name="naeill0126">서해문집 편집부, 《내일을 여는 역사 제11호》 (서해문집, 2003) 126페이지</ref> [[고려 우왕|우왕]]과 창왕이 왕위에 오를 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조선 태조|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정치적 필요에 의하여 그들을 [[신돈]]의 후손으로 내몰아 결국 죽였는데, 자신들이 이전에 인정하였던 왕들을 죽인 작업에 [[정몽주]] 역시 동의하였던 것이다.<ref name="naeill0126"/> [[정몽주]] 역시 [[고려 우왕|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후손이라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아니라는 반론을 제시하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