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숙 (1917년 12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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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im Jeong Suk 2.jpg|thumb|left|170px|김정숙]]
=== 출생 ===
김정숙은 [[1917년]] [[12월 24일]]에24일에 [[함경북도]] [[회령군]] [[오산동]](지금의 [[함경북도]] [[회령시]] [[오산동]])의 가난한 농가(農家)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 일제 강점기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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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im Il song & Kim Jeong Sook 1930s.jpg|thumb|left|170px|만주 유격대 시절<br />(남편 [[김일성]]과 함께)]]
[[파일:Kim Ilsung 1930's.jpg|thumb|right|160px|만주 유격대 시절<br />(남편 [[김일성]]과 함께)]]
[[1932년]]에1932년에 일제는 김정숙의 아버지와 가족, 친척들을 강제로 납치하여 아버지와 오빠를 살해하고, 재산과 토지를 모두 몰수했다. 김정숙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1935년 만 17세 때 동북항일연합군(소련군 극동사령부 휘하 부대) 빨치산 취사병이 되었다. 1935년 9월에 [[만주]] [[안투 현]](安圖縣)에서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혁명활동을 전개하다가, 그 이듬해인 [[1936년]] [[4월]]부터4월부터 [[김일성]]의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서 친위전사로 복무하며 <시난차 전투>, <서강 전투>, <무송현성 전투> 등에 참가했다.
 
[[1937년]] [[1월]]에1월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활동하였다. [[1937년]] 다시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에 가입했고, 거기서 [[김일성]] 작전사령관([[중대장]]급)이 지휘하던 [[동북항일혁명군]]에 입단해 위생 및 취사 업무에 복무하면서 여군사령관([[소대장]]급)을 역임했다. [[김일성]]은 김정숙의 재주를 인정해 경호원으로 임명했고, [[동북항일혁명군 신갈파부대]]의 부대장으로 임명했다.
 
김정숙은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면서 [[삐라]]와 [[게릴라전]]을 통해 민중들을 항일독립운동에 참가하도록 호소하였고, [[1937년]] [[6월 4일]]에4일에 일어난 [[보천보 전투]]의 승리에 기여하였다. 1937년과 1938년에 김일성으로부터 임무를 받고 장백현 도천리와 국내의 신파(김정숙군), 신흥, 풍산(김형권군), 허천, 낭림, 단천, 이원, 홍원, 북청일대 등 여러 지역에서 당 및 혁명조직과 <조국광복회>조직을 확대하는 사업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여 항일혁명투쟁을 전개했다.
 
==== 김일성과 결혼 ====
[[파일:김일성 가족.jpg|thumb|right|250px|남편 김일성, 아들 김정일과 함께]]
김정숙은 [[1940년]] [[9월]]에9월에 [[김일성]]과 결혼 생활을 시작했고, 그 해 [[10월]]에10월에 김일성과 함께 [[소련]]으로 넘어갔다. [[1941년]] [[2월 16일]]에16일에 [[소비에트 연방]] [[뱌츠코예]]([[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백두산 밀영]]이라고 주장함)에서 첫째 김유라([[김정일]])를 낳았고,<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4256396 KBS 특별기획 김정일 3부작 '김정일의 모든 것을 찾아서'] 뉴시스, 2011.12.22</ref> [[1944년]]에는1944년에는 둘째 김슈라([[김만일]])를 낳았다.
 
=== 해방 직후 ===
[[파일:Kim Jeong Il and Kim Jeong Sook 1948.jpg|thumb|right|230px|아들 [[김정일]], 딸 [[김경희]] 등과 함께 강원도 화진포에서 ([[1948년]] [[8월 7일]])<br />맨 뒷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김정숙, 가운뎃 줄 첫번째가 아들 [[김정일]], 세번째가 딸 [[김경희]]]]
[[1945년]] [[8월 15일]]에15일에 일제가 패망하자 남편 [[김일성]]과 함께 평양으로 귀환했고, 이듬 해인 [[1946년]] 5월에 딸 [[김경희 (정치인)|김경희]]를 낳았다. [[1947년]] 여름에 둘째 [[김만일]]이 김일성 관저 연못에 빠져 사망하였다.
 
[[1948년]] [[3월]] 연극 《백두산》시연회를 참관하였다. [[1948년]] [[9월]] [[김일성]]이 내각 수상이 된 후, 중앙여맹위원장 사업에 추천받았으나 사양하였다.
 
=== 사망 ===
[[1949년]] [[9월 22일]] 새벽 2시 40분에 아이를 낳다가 사산(死産)하고 심한 하혈에 의한 쇼크로 사망하였다. 향년 33세<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0051300209205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90-05-13&officeId=00020&pageNo=5&printNo=21116&publishType=00020 비화 김일성과 북한 : 전 북한군 사단 정치위원 여정(呂政) 수기 <4> 김성애는 시종비서 여군 출신] 1990.05.13 동아일보 5면</ref>
 
=== 사후 ===
[[파일:Kim Jong-il in North Korean propaganda (6075332268).jpg|thumb|right|250px|김일성, 김정일, 김정숙을 소재로 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그림]]
[[파일:Pyongyang Revolutionary Martyrs Cemetery - statue 7.jpg|thumb|right|250px|평양 대성산혁명열사릉에 전시된 김정숙의 흉상]]
묘지는 [[대성산혁명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prometheus.co.kr/articles/120/20060813/20060813190300.html|제목=북한의 열사릉, 그 상징과 폭력 : 혁명열사릉과 애국열사릉|출판사=프로메테우스|저자=차문석|날짜=2006-08-13|확인일자=2008-06-28}}</ref> 김정숙은 해방 후 공식적인 직책을 맡은 적은 없으나, 사후 장군으로 추존되어 '백두여장군', '김정숙 여장군님' 등의 존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양강도]]에는 그의 이름을 딴 [[김정숙군]]과 [[김정숙읍]]이 신설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그의 항일 투쟁과 해방 이후의 새 조국 건설 사업에 남긴 업적이 높다며 《3대장군》중 한명으로 받들었다. [[함경북도]] [[회령시]]와 [[양강도]] [[김정숙군]] [[김정숙읍]] 등지에 동상이 있고, 혁명열사릉에 흉상이 있으며, [[조선인민군]] 해군간부를 양성하는 초급 대학 중 그의 이름을 딴 [[김정숙해군대학]]이 있다.
 
== 연보 ==